점심시간

너의 새로운 의미

by 수리양

점심시간이라는 것이 특별하지 않았다. 전업주부의 하루에서는 말이다. 내 시간을 내가 꾸려 나가던 전업주부씨에게 점심시간은

때로는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대충 한 끼 때우는 시간,

그것도 귀찮으면 라면 하나에 계란 하나 넣고 넷플릭스와 함께 보내는 시간,

혹은 집안일이 바빠서 잊어버리고 그냥 지나가는 시간,

또 어떤 때는 여유롭게 주중의 런치메뉴를 즐기며 지인들을 만나는 회동의 시간이었다. (주중의 런치메뉴라니!)


삼십 년 넘게 직장인으로 살아온 남편의, 점심시간에 억지로라도 산책을 나간다고, 그렇지 않으면 매일이 너무 똑같다는 이야기, 별것도 아닌 샌드위치가 괜히 비싸다는 불평, 밖에 해가 쨍하면 산책 후 사무실로 도로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나 억울하다는 말도 전에는 와닿지가 않았다.


근 이십 년 만에 새내기 직장인이 되어 출퇴근을 하게 되자 점심시간이란 것이 갑자기 볼드체 고유명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꾸 시계를 확인하고,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 미리 계획하며 기다리고, 그 시간이 하루의 하이라이트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남편의 말대로 해가 쨍한 파란 하늘의 아름다운 런던의 정경은 정말로 돌아서는 내 바짓단을 붙잡았다.


우중충한 런던의 겨울 안에서 고꾸라지기 딱 한 숨 전에야 손을 내미는 얄미운 해가 얼굴을 비추면, 치사하고 말고 상관없이, 얄미움은 온데간데 없어진 채, 그저 반가워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수없이 걸었을 그 거리를 걸으며 선배 언니들은, 관광객처럼 감탄하며 쉴 새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내 화면 안으로 미소를 머금고 기꺼이 들어와 주었다. 아마 이젠 너무도 익숙해져서 설렘이 다 닳아 없어진 그녀들에게 이 늦깎이 신입의 감탄과 흥분은 신선한 한 줄기 바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걸어서 한바퀴 돌기에 딱 좋은 세인트 캐서린 독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타워 브릿지
금융가의 중심-로얄 익스체인지




하기야 그녀들은 말할 것도 없이, 입사 3개월 즈음부터는 점심시간에 근처를 걸어도 좀처럼 전화기를 꺼내 들지 않는 나를 발견했으니, 나도 서서히 심드렁해지고 있었던 거다. 무엇에든 빨리 적응하는 이면엔 금세 시들해지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회사 주변이 지겨워질 때면 더 멀리 모험을 떠날 수도 있다. 점심시간 시작과 함께 바람처럼 달려 나가 버스를 타고 런던브릿지를 건너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버로우마켓이 있다.


일 년에 런던에 나가는 횟수가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던 나는 입사 후에야 그 유명한 버로우 마켓에 가봤다. 알고 보니 역사가 깊은 이곳에서 유명한 버섯 트러플 리조토도 먹어보고 인스타에 자주 소개된다는 도넛맛집도 들러본다. 물론 신데렐라 저리 가라 하며 점심시간 끝이 다가오면 먹던 것을 급히 욱여넣고 뛰어야 하지만, 그 작은 모험은 스릴이 넘치고 일상에 작은 반향을 불러온다.




이제 열 달이 다 되어가는 회사생활을 하며, 중년에 접어든 나를 들여다보는 충분한 시간을 갖은 뒤에 깨달은 바는, 나는 반복적인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약간 안타까운 면이 있는데,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매우 반복적이며, 성공적으로 반복해야 성과가 있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을 했다.


회사 일에선 반복을 하고, 점심시간엔 변화를 찾기로.


그것이 늘 가능하거나 쉽지는 않지만, 다행히 나와 장단 맞춰주는 사람들이 있고, 내 변덕을 지금까지는 이해해 주는 감사한 인연들이라 나는 조금 마음을 놓고 점심시간을 다채롭게 꾸며 줄 작은 변화들을 꾀해본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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