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경단의 끝
기억이 난다.
첫 출근하던 아침.
워털루 역에서 내려 플랫폼에서 바로 연결된 지하도로 내려갔었다. 언니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니 이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통로가 나왔다. 통로를 따라 나뭇가지처럼 갈라진 계단들에서 서로 다른 플랫폼에서 내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지류가 모이듯 모인 사람들이 흘러가는 곳 끝에는 워털루역과 뱅크역 사이만을 다니는 워털루-시티라인 지하철이 나온다. 말하자면 이 한 정거장 짜리 짧은 노선은 워털루 기차역과 회사들, 특히 금융업계 회사들이 밀집한 ‘시티’ 지역을 연결하는, 출퇴근용 라인이라 할 수 있겠다. 시티로 출근하게 되기 전까지 난 이런 라인이 존재하는 것도 몰랐었다.
영국사람들은 정말 줄을 잘 선다.
표를 넣고 들어가면 사람들은 길게 두 줄을 만들어 환승을 위해 카드를 찍는다. 오이스터 카드를 쓰는 사람들이다. 나는 초짜라 종이표를 샀다. 혹시 아는가 18년 만에 갑자기 회사원이 되어 급변한 생활을 몸이나 정신이 견디지 못해 탈이 날는지. 일단은 한 달짜리 종이표다. 그리고 우리 집은 멀어서 오이스터 카드도 못쓴다.
오이스터 카드를 찍는 두 개의 긴 줄 사이를 비집고 램프를 내려가면 드디어 나오는 시티라인 지하철 플랫폼. 양쪽 입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순서대로 또 줄을 선다. 한 서너 명쯤 쌓이면 그 옆에 줄을 서는 모양이 꼭 자판기 음료 같았다.
이제 나도 그중에 하나가 되는구나. 진열대에 자리한 음료수 캔 같은 삶. 아니면 위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줄을 서고 기어오르는 애벌레 같은 삶.
그러나 아직은 그것이 절망적이진 않다. 아직은 신기하고- 이 나이에 내가 회사원이 된 것이- 아직은 실감도 안 난다. 하지만 언젠가는 오늘을 떠올리며 신세 한탄을 할 수도 있겠지. 아마도 오늘이 생각조차 나지 않는 수많은 날을 견딘 끝에는.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rat race에 합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