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우기와 자라기
요즘 화사의 새 노래가 정말 매력적으로 들린다. 노래도, 분위기도, 새로운 콘셉트도 예쁘다. 사연은 다르지만 나의 이별도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생각이 드니 ‘굿 굿바이’ 부분이 입에 맴돈다.
대학생 딸이 있다 하면 다들 놀란다. 요즘세대 치고는 일찍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편이다. 절대 아이는 없을 거고 결혼도 안 할 거라던 이의 흔하디 흔한 반전 케이스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부정어는 못 듣는다더니 ‘아이‘와 ‘결혼’만 듣고 내 삶을 그쪽으로 끌어당겼나 보다.
올해 9월에 큰 아이가 대학으로 떠났다.
굿 굿바이다.
수도권에서 평생 살고 대학은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하는 게 정답이던 삶을 살던 내게 대학을 찾아 전국을 누비는 영국의 대학탐방은 매우 낯설었다. 작년 가을, 두 달에 걸쳐 전국의 대학들 가운데 아이가 관심 있던 대여섯 곳을 방문했었다. 다행히? 가장 먼 거리의 대학은 두 시간 반 떨어진 곳이어서 새벽 일찍 집을 나섰던 기억이 있다. 대학들의 설명회인 ‘오픈 데이‘는 주로 오전 9시경부터 오후 서너 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큰 아이는 만 네 살에 영국을 떠나 한국에서 살다가 만 12살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런 떠돌이 같은 삶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걱정도 했다. 사춘기도 세게 와서 둘이 부둥켜안고 눈물콧물 쏟기도 했다. 그래도 그 시간이 다 지나니 아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게 아니라 여기이기도 하고 저기이기도 한쪽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다. 한국을 자신의 뿌리로 보는 데에는 달라진 한국의 위상이나 한류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영국에 다시 돌아와 사립 중학교를 다녔다. 원하던 공립학교에 자리가 없어서 잠시 다니려던 게 졸업까지 해버렸다. 당시 한국병에 단단히 들어있던 아이는 자신과 공통관심사를 갖는 친구를 쉬이 찾지 못했다. 그때는 지금보다는 한류가 퍼지지 않았을 때인 데다 백인이 다수인 사립학교 아이들과 알 수 없는 벽을 느꼈다고 나중에 말해줬다.
대입학년인 12학년이 되면서 집 근처 가톨릭 학교로 옮기고 나서 아이가 변했다. 지금까지 내가 키우느라 열심이었다면 이제는 아이 스스로가 자라려고 열심인 듯 보였다.
아이에게 첫 번째 큰 터닝포인트는 여름방학에 프랑스로 짧은 어학연수를 다녀온 것이다. 걱정, 두려움이 많고 소극적이던 아이가 용기를 내어 혼자 2주를 지내다 온 것인데, 어학연수의 본래 목적을 달성했다기보다는 인생일대의 경험을 안겨준 것 같다. 말 그대로 그 이후 아이는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대입 시험을 모두 마치고 한국에 혼자 3주를 다녀올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경험이 한몫했다.
여름방학 끄트머리에 대입 결과가 발표되었다. 다행히 아이는 원하던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또 다른 챕터가 펼쳐졌다. 우리 둘 모두에게.
영국의 대학생들은 대부분 집에서 떠나 기숙사에서 최소한 첫 해를 보내게 되므로 살림살이 장만부터 생각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케아만 가도 이 즈음에는 냄비, 프라이팬, 식기를 모다 놓은 학생세트를 만들어 팔 정도다.
내 품 안에서 열아홉 해를 키운 자식이 성인이 되어 둥지를 떠난다는 생각은 아득하게 현실감이 없는 감상으로만 다가왔었다. 기숙사로 들어가는 날까지는.
대학 기숙사 입소 절차도 낯설었는데, 전국에서 오는 수많은 학생들의 행렬을 통제하기 위해 삼 일간 입소 날짜 중에 30분간의 슬롯을 선택해야 했다. 그 말은 차 한 대에 사람도 타고 그 많은 짐도 다 싣고 그리고 짐 옮기는 것은 30분 안에 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가져가는 짐을 싸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는데, 큰 차를 렌트하자는 남편을 설득해서 내가 어찌 싸 보겠다고 했으니 나에게 숙제처럼 남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굴의 한국엄마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지 않던가. 크지도 않은 내 차에 네 식구가 타고 그 많은 짐을 깔고 앉고 무릎에 올리고, 보이는 모든 공간과 틈에 채워 넣는 데 성공했는데 이날만큼은 운전자가 가장 편한 역할이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전투모드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떻게든 필요한 걸 다 싸야 하고 남김없이 다 가져갈 수 있게 만들어야 했고 처음 해보는 기숙사 입소에서 주어진 시간 안에 미션을 해 내어야 했다.
조용한 곳을 선택한 아이의 취향을 반영한 건지 랜덤으로 결정되는 기숙사 건물과 방의 위치는 도착해서 보니 가장 안쪽의 가장 높은 층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기숙사 키가 등록이 안 되어있다든가 하는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도저히 30분 안에 해낼 수 없는 상황에, 건물 앞에서 안내하던 분이 그냥 천천히 하라고 했다. 차를 세운 곳에서 가장 먼 건물의 가장 높은 층으로 그 많은 짐을 옮겨야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모든 것을 다 옮기고야 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여기가 내 새끼의 집이다. 너무 오래 머무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두고 돌아서기엔 아쉬워서 장을 보러 갔다가 저녁도 먹고 들여보냈다.
이제 정말로 헤어져야 할 시간. 마지막 순간까지 투닥거리고 날을 세우던 우리 둘이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기숙사 앞에서 앞으로 자기가 스스로 요리해야 할 식료품 장거리를 손에 쥐어주고 돌아서는데 심장이 저릿해왔다.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평소에 사랑한다는 말을 안녕하세요 처럼 쉽게 하는 둘째와는 다르다.
결국 아이도 나도 말을 아꼈다. 그냥 말없이 안고 보듬었다. 서로의 눈물을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두 시간이 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흐느꼈다. 못해준 것만 생각나고 미안한 일들만 떠올랐다. 지금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순간임이 너무 분명하게 다가왔다. 더 이상 흐릿한 이미지도 감상도 아니었다. 아이는 나와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 없이… 그녀의 삶을 항해하는 방향타를 이제 스스로 잡게 된 것이다. 축하해 주어야 할 일이다.
아이는 다음날 카톡 한 줄을 보냈다.
와 반찬 있어서 겁나 다행이야… 밥솥은 익숙하지 않아서 약간 죽이 됨.
없는 시간 쪼개서 몇 가지 밑반찬 만들어 보내길 잘했다 싶었다. 딴에도 고맙다는 표현을 저리 한 것이리라.
한동안은 텅 빈 아이의 방을 열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내가 키우는 건 이제 다 끝나고 이제는 스스로 자라고 있는 아이의 새 출발을 기뻐해야 하고 축하해줘야 한다는 건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다음 방학에 오면 무얼 먹고 싶은지 넌지시 물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