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부산 동구 출신.
몰티즈.
8세. 곧 9세.
지금은 영국거주.
모국어는 한국어. 하지만 영어도 일부 알아들음.
해피는 해피할까?
‘해피 어때?’
나의 물음에 시크한 큰 딸의 답.
“안광이 없음”
해피는 예민하고, 엄마를 제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나 강아지를 싫어해서 짖으며,
쓸데없이 용감해서 큰 개를 봐도, 여우를 봐도 쫓아간다.
해피는 입맛이 까다롭고,
음식을 잘 씹지도 않고 순식간에 삼켜버리며,
귀를 마사지해 주는 걸 좋아한다.
해피의 장기는 두 발로 서서 쉬야하기.
그냥 어릴 때부터 실외 배변할 때면 두 뒷다리를 다 들더니
지금까지도 물구나무 선 자세로 쉬야를 한다. 누구를 닮았는지 원…
해피는 아삭아삭한 양상추의 하얀 부분을 좋아하고 당근은 먹지만 오이는 안 먹는다.
가장 좋아하는 곳은 엄마 무릎인데 엄마가 무릎을 세워서 앉으면 허벅다리를 등받이로 삼아 V자 틈에 착 하고 앉는다. 마치 본체를 찾아가는 로봇 청소기처럼. 마치 이곳이 나의 돌아갈 곳인 것처럼.
해피는 발톱 깎는 걸 싫어해서 집에서 하다 하다 결국 포기하고 동물병원 간호사에게 발톱을 맡기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세 달에 한 알 먹는 심장사상충 약은 참으로 교묘하게 잘도 뱉어내는 관계로 그것도 간호사선생님의 일이 되었다.
해피는 칫솔질과 빗질도 싫어하는데 한국에서 길게 기르던 하얀 털은 영국의 젖은 겨울을 지내고 나선 영영 볼 수 없는 모습이 되었다. 막내로 갈수로 너그러워지는 부모의 육아방식 탓에 빗질을 싫어하면 그냥 좀 밀어주고 칫솔질을 싫어하면 모른 척 넘어가주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해피의 이빨이 엉망이 되어있었지만 자연에서 사는 동물들도 잘 사는데 뭘.. 하며 모른 척 고개를 돌렸던 것이 사실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건 몇 주 전에 터그 놀이하다 약간의 피가 묻어 나오는 걸 본 후다. 발톱 자르러 간 김에 간호사에게 보여주니 살짝 만져본 앞니 하나가 눈에 보이게 흔들렸다. 설마… 그냥 믿고 싶지 않아서 무시했었던 게 사실이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마침 치아 스케일링 20프로 할인 기간이라 견적이라도 보자 하고 약속을 잡았다. 스케일링 비용 따로, 마취비용 따로, 발치비용도 다 따로인데 최소 6-700 파운드는 들 거였다. 이빨이 흔들리는 걸 본 이상 그냥 둘 수는 없었기에 이 기회에 스케일링도 받고 흔들리는 아랫니도 뽑으면 덜 아프겠거니 싶어 스케일링과 발치 예약을 했다. 평일만 가능하대서 미리 휴가도 냈다.
아침에 데려가면 오후 늦게나 끝난다고 했다. 그래도 이미 흔들리는 이빨이니 빼는 건 금방 끝날 거라고 안심시켜 줬다. 그렇지만 마취를 하고 꼼꼼히 체크를 해보고 발치해야 하는 이빨이 늘어날 수 있다고도 했다.
아침 일찍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산책을 나갔다. 다 괜찮을 거야 해피야. 금방 끝날 거야.
병원에 가니 오늘 있을 처치와 비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혈액검사는 옵션인데 검사를 하면 결과에 따라 약물을 알맞게 정할 수 있다. 링거도 옵션인데 마취 후에 혈압이 떨어지면 필요할 수 있어서 추천한다. 하지만 결정은 알아서 하시라.
이걸 옵션이라고 할 수 있느냐 말이다. 옵션이라고 부르고 필수라 쓰는 게 아닐까.
결국 700파운드를 훌쩍 넘기는 처치내용에 동의를 하고 해피를 맡기고 나왔다. 아랫니 안쪽이 특히 플라그가 심하니 잘 봐달라고 부탁을 하고.
세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보통 픽업을 한다는데 네시가 넘어도 연락이 없다. 답답해서 전화를 했더니 다 잘 끝나고 마취에서 깨고 있다고, 한 시간 후에 오면 된단다. 마침 둘째 아이도 하교한 터라 같이 픽업을 갔다. 마취에서 잘 깨었다니 일단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도착하니 프런트에서 인보이스를 보여주며 먼저 결재를 하란다. 옵션으로 넣었던 피검사와 링거 외에 엑스트라 발치 비용이 보여서 이빨을 하나 뽑는 거였는데 이건 뭐냐고 물었더니 알아보겠다고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온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해피는 이빨을 열한 개를 뽑아서 그렇단다.
열한 개? 열한 개?!
마취 후 들여다 보고 필요에 따라 발치 개수가 늘어날 수 있다고 하긴 했지만 열한 개라니… 충격에 쌓여 말문이 막혔다. 같이 간 둘째는 재빨리 구글을 두드리더니,
‘엄마, 개는 이빨이 40개가 넘어서 열한 개 빼도 30개는 있어요.‘ 라며 위로를 해준다.
결국 800파운드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야 해피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곤 방으로 불러서 이빨 차트를 보여주며 어디가 어떻게 상했었고 그래서 어디를 뽑았는지 자세히 설명을 했다. 반은 듣고 반은 아직도 충격에 들리지도 않는 와중에 약을 받아왔다. 해피는 슬퍼 보였다.
해피는 꼼작도 않았고 눈은 정말 슬퍼 보였다.
얼마나 놀랐을까.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 이빨이 몽땅 빠지고 잇몸은 아프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잘한 일이 맞는 걸까? 해피는 나를 원망할까?
다음날 출근하는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다행히 남편이 재택근무라서 꼼짝도 않는 해피를 들어서 정원에 데려가야 화장실을 볼 거라고 일러두고 집을 나섰다. 충격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고, 자책과 후회와 의구심으로 가득 찬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예방책이라고 한 처치가 정말 필요한 것이었을까? 사람이 기고만장 잘난 척하고 감히 끼어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냥 두었던 것이 해피에게 더 나은 건 아니었을까?
24시간 후에 진통제와 항생제를 주라는 간호사의 말이 떠올라 회사에 말을 하고 30분 일찍 나왔다. 그리고 평소보다 한 시간 이른 기차를 타기 위해 뛰었다. 미안함과 안쓰러움과 고마움과 안도를 동시에 느끼며 달려가보니 해피는 내 침대 위 담요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고 곳곳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하루정도는 침에 피가 섞여있을 수 있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어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배가 고플 텐데 아직 입안이 아픈지 잘 먹으려 들지 않았다. 강아지 보신에는 황탯국이 좋다는 말이 떠올라 급히 황태를 넣고 국을 끓였다. 그리고 밥에 황탯국물을 조금 섞어 질죽하게 만들어 조금씩 손 위에 덜어서 손으로 먹였다. 항생제와 진통제를 섞은 밥이라서 꼭 먹여야 했다.
밥을 먹고 나서 기분 탓인지 해피의 눈에 생기가 조금 생기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조심스럽고 죄스러워서 입안을 열어보지는 못했다. 내일이면 다시 병원에 가서 상태를 체크할 것이니 그때까지는 기운만 차리자.
원망스러울 만도 한데 해피는 내 곁을 파고든다. 용서해 주는 건지 이해해 주는 건지 더 미안하다. 내 머릿속 계산상으로는 맞았다. 더 노견이 되기 전에, 마취에서 못 깨어날까 걱정하게 되기 전에 이쯤에 스케일링 한번 싹 해서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더 잘 관리해 주면 되겠다 싶었다. 계산에 미처 넣지 못한 것은 현재의 치아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을 수 있다는 것. 악화를 막기 위해 제거를 하는 매우 ‘인간다운’ 선택에 나도 모르게 동의했다는 것이다.
해피는 삼일이 지난 지금 거의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산책도 하고 짖기도 하고 간식도 찾는다. 물론 당분간 평소에 먹던 간식은 못 먹고 부들부들한 삶은 닭간을 대신 준다. 이틀째 방문한 체크업에서 간호사 선생님이 입안을 꼼꼼히 살피며 잇몸이 잘 아물고 있다고 좋은 신호라고 했다. 그제야 처음 본 해피의 입안에는 새하얗게 빛나는 이빨들이 제일 먼저 보였다. 스케일링의 효과가 이렇게 좋은 줄 알았더라면 진즉에 시켜줬을 텐데 뼈아픈 후회가 밀려왔다.
무지한 개어멈 때문에 고생을 시켜서 미안한 마음은 오늘까지만. 남은 생은 엄마가 책임지고 더 행복하게 해 줄게.
해피야, 해피하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