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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작가 Feb 15. 2020

[2]스타벅스 창업자의 스승, 커피 영감 알프레드 피트

네덜란드 커피상 아들, 미국 커피를 혁신하다

아침마다 마시다 보니 어느샌가 길들여진 피츠커피. 맛있다. 중독됐을만큼. 커피를 좋아하는 동네 지인들 중에도 피츠커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개인적 취향과 무관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나는 이 커피를 빼놓고 미국 커피의 역사, 아니 세계 커피의 역사를 얘기할 수 없다고 본다. 너무 거창한가. 세계를 주름잡는 스타벅스 커피의 원조인데도?


피츠커피 매장 숫자는 많지 않다. 미국에만 있고, 총 260개 정도다. 세계적으로 3만1000개가 넘는 매장이 있는 스타벅스에 비하면 구멍가게다(피츠커피와 스타벅스는 둘 다 모든 매장이 회사 직영이다). 피츠커피는 그 중 약 200개가 캘리포니아에 있는데, 처음 문을 연 1호점이 있는 버클리에 7개, 샌프란시스코에 30개가 있다. 피츠커피는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을 대표하는 커피다.


피츠커피는 1966년 알프레드 피트(Alfred Peet)가 미국의 명문 공립대학 버클리캘리포니아대(UC Berkeley) 캠퍼스 근처에 피츠커피 매장을 열면서 출발했다.

버클리캘리포니아대 캠퍼스 근처에 있는 피츠커피 1호점. 1966년 알프레드 피트가 문을 연 이곳은 피츠커피 매니아의 순례지가 됐다. 사진: 황작가


네덜란드 태생의 젊은이가 미국에 건너와 나이 마흔 중반에 버클리에서 커피 장사를 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알프레드 피트는 '커피 엘리트'였다. 커피 가문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커피 영재가 된 네덜란드 커피상 아들이었다. 그는 부모가 커피콩을 볶고 커피 맛을 음미하며 커피 얘기를 나누는 걸 지켜보며 자랐다. 청년이 돼선 커피와 차의 품질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그가 미국에 와서 만든 커피가 '피트의 커피', 피츠커피(Peet's Coffee)다. 처음 시작할 때 이름은 '피트의 커피, 차, 향신료(Peet's Coffee, Tea & Spices)였다. 네덜란드에서 아버지가 그랬듯이 직접 볶은 커피 원두와 함께 차, 향신료를 팔았다.


알프레드는 1920년 3월 10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북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알크마르(Alkmaar)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커피 생두를 볶아서 판매하는 커피상이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커피상들이 그랬듯 커피와 차, 향신료를 같이 팔았다. 외가쪽도 같은 일을 했다.


알프레드 피트의 삶에 대한 내용은 네덜란드 기자 야스퍼 하웃만(Jasper Houtman)이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과 네덜란드 현지의 가족 등을 인터뷰해 쓴 <The Coffee Visionary>(Business Contact, 2016)라는 책을 참고했다. 일종의 전기인 이 책은 피츠커피 매장에서도 판다.


하여튼 알프레드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두 명의 누나들과 달리 아버지 기대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 일을 돕다가 군대를 다녀왔는데 20대 후반에 집을 뛰쳐 나갔다.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살아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그는 가출, 아니 출가를 한 뒤 차(tea) 품질관리 일을 했다. 평생 커피 이상으로 애정을 쏟았고, 지식이 깊었던 게 차였다고 하니 차 품질관리는 꽤나 어울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를 떠나 런던의 차 회사 립튼(Lipton)에서 잠시 일하다가 1948년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갔다. 자바커피의 원산지, 바로 그곳이었다. 인도네시아 농장에서 재배하는 품질 좋은 커피와 차를 실어갔던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차 품질관리 담당 직원으로 일했다. 그 시절 그는 자바섬과 수마트라섬 커피농장에서 커피나무와 열매를 보며 어려서부터 배웠던 커피를 최일선 현장에서 체험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독립운동이 거세지던 1950년 뉴질랜드로 갔다. 하웃만의 책에는 알프레드가 식민주의를 "바보 같은 개념"이라며 비판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어찌됐든 그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서 차와 커피를 실어가는데 자의든 타의든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뉴질랜드에서 여유있게 쉬고 놀며 지내다가 다시 차 회사에 취직했는데, 좀 더 큰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미국행을 택했다. 비자를 받고 미국 땅을 밟은 건 1955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이유는 그때 타고 온 배의 목적지가 샌프란시스코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샌프란시스코 가는 배를 탔고, 내리고 보니 이 동네의 온화하고 맑은 날씨가 마음에 들어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살았을지는 그림이 그려진다. 낯선 동네, 타국에 이민 온 사람들이 그렇듯 당연히 힘겹게 살았겠지. 실제로 그는 차나 커피 관련 일을 하고 싶었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여성복 매장에서 옷을 팔았다. 중고차 딜러도 했고, 백과사전 성경 방문판매원 일도 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그는 무척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러다 커피 생두를 수입하는 제법 큰 규모의 회사에 취직했지만 사장에게도 할 말은 하는 올곧은(?) 성격 때문이었는지, 회사 경영 사정 때문이었는지 얼마 안 가 잘렸다.


그는 커피 창업을 할 운명이었다. 커피 생두 수입회사에 다니던 시절 그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에 왔는데 말이야. 근데 왜 사람들이 쓰레기 같은 커피를 마시지?"


창업을 한 건 이민생활이 10년 조금 넘은 1966년, 그의 나이 46세 때의 일이다. '쓰레기' 같은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커피 맛을 보여주면 충분히 장사가 될 거란 생각에 아버지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돈으로 커피매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선보인 다크 로스트(dark roast)는 커피 세상을 바꿔놨다.


버클리 피츠커피 1호점 내부. 사진: 황작가


버클리 피츠커피 1호점 내부. 알프레드 피트 사진(우측 액자)과 초기 커피 생두를 볶는데 사용했던 Royal #5 roaster(우측 하단) 등이 전시돼 있다. 사진: 황작가


그때까지 미국에선 싸구려 '로부스타' 품종 커피 생두를 살짝 볶아 파는 원두가 대세였다. 조금만 오래 볶으면 타 버리는 품질 낮은 생두라서 살짝 볶아 판매한 것이었다. 라이트 로스트(light roast)였다. 질 높은 생두를 살짝 볶아 판매하는 요즘 인기 있는 라이트 로스트 커피들과는 원재료에서 천양지차가 나는 커피였다. 알프레드 피트는 싸구려 생두를 볶은 라이트 로스트와는 완전히 다른 커피를 팔았다. 고급 '아라비카' 품종은 커피 역사가 오래 된 유럽에만 공급되던 시절, 그는 아라비카 커피 생두를 수입해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맛을 내는 방식으로 충분히 볶아 팔았다. 다크 로스트였다.


그의 매장은 가정에서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도록 커피 원두를 판매하는 매장이었다. 매장에 의자 두 세개를 두고 커피 음료를 판매하는 커피바(coffee bar)도 운영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커피를 내려 음료로 팔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손님들에게 제대로 내린 커피를 맛보게 하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교육을 시키려 했던 것이다. 맛있는 커피를 마셔본 적 없는 미국 커피 촌놈들이 자신이 만든 고급 원두를 집에 갖고 가서 엉터리로 내려 마실 생각을 하니 복장이 터졌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 이런 고급 원두를 이런 방식으로 내려서 마시면 이런 맛이 난단 말이다. 알겠니, 이 '커알못'들아!


피츠커피 1호점 매장 내부. 사진: 황작가


재밌는 건 이런 그의 방식이 통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버클리는 샌프란시스코와 더불어 미국 카운터컬쳐(counterculture)의 중심지였다. 히피 천국이었다. 히피들은 재즈를 좋아하는 만큼 커피도 좋아했다. 피츠커피가 문을 열자 주변 히피들이 몰려들었다. 그동안 마시던 연하고 밍숭맹숭한 커피가 아니라 한잔 들이키면 사망할 듯한 사약 빛깔 커피의 진한 맛과 향에 끌린 것이었다. 갓 로스팅한 커피 원두가 나올 때면 매장 앞엔 길다란 줄이 생겼는데, 그 중엔 히피들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피츠커피가 없었으면 스타벅스도 없었다. 이건 스타벅스 창업자들과 스타벅스를 세계 최대의 커피기업으로 키운 하워드 슐츠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다. 스타벅스는 1971년 시애틀에서 두 명의 교사와 한 명의 작가, 이렇게 세 친구가 의기투합해 문을 열었다. 셋은 커피를 좋아했지만 커피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스승이 알프레드 피트였다. 소문 듣고 먼 길 찾아간 커피 장인에게 '커피 매장을 하려고 하는데 아는 게 없으니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셋은 알프레드 피트의 매장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커피를 배웠다.


스타벅스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는 시애틀 파이크 플레이스 매장. 원래 근처 다른 장소에 있던 1호점을 옮겨온 사실상의 1호점이다. 사진: 황작가


그들은 피츠커피에서 원두를 공급받아 시애틀에 고급 커피 원두를 판매하는 스타벅스 매장을 열었다. 피츠커피의 영향을 받아 매장 이름도 '스타벅스 커피, 차, 향신료'로 짓고 차와 향신료도 팔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츠커피에서 로스팅한 원두가 아니라 생두를 사들여 직접 알프레드 피트의 방식과 유사하게 로스팅을 했다. 스타벅스 커피 맛은 그렇게 탄생했다. 나중에 스타벅스에 합류해 CEO가 된 하워드 슐츠는 공동 저술한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신화>(김영사, 1999)에서 스타벅스의 정신적인 대부가 미국에 다크 로스트 커피를 들여온 알프레드 피트라고 밝히고 있다. 하워드 슐츠가 세계적인 커피 기업을 일군 커피 사업가라면 알프레드 피트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커피 맛을 창조한 커피 혁신가였다.


다음편은 버클리 피츠커피 1호점을 중심으로 형성된 '미식가의 게토(Gourmet ghetto)' 이야깁니다.



[번외편] 버클리 커피 영감과 신당동 떡볶이 할매


알프레드 피트를 생각하면 신당동 떡볶이 할머니가 생각난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대명사였던 마복림 할머니. 2011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마도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에 부고 기사, 리포트가 났다. 나도 신당동에 한자락 추억이 있다. 중학교 때 서울로 이사 온 정읍 촌놈이 신당동 떡볶이 맛을 본 건 서울올림픽을 한 해 앞둔 1987년 여름이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친구 녀석이 떡볶이가 맛있다며 내 손을 잡아 끌고 신당동 떡볶이 골목엘 갔다. 춘장과 고추장을 섞은 독특한 양념의 즉석떡볶이는 내가 시장통에서 사먹던 빨간 떡볶이와는 확실히 다른 맛이 났다. 헉, 떡볶이에서 이런 맛이!


"고추장 비밀은 며느리도 몰라."

할머니를 전국구 스타로 만든 고추장 TV광고가 등장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떡볶이 혁신가였다. 혁신이 별건가. 떡볶이 양념으로 고추장 간장만 쓰던 시절, 고추장에 춘장을 배합한 마복림 할머니의 떡볶이는 신선한 충격이었으리라. '신당동 떡볶이'라는 걸출한 음식을 탄생시켰으니 감히 어찌 혁신이란 말을 쓰지 못하리오. 할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했을 때 신문에 난 부고기사엔 이런 내용이 실렸다.


"1953년 한 중국집에서 자장면 그릇에 가래떡을 빠뜨렸다가 자장소스 묻은 떡을 맛보고는 곧바로 '마복림식 떡볶이' 가게를 냈다. 당시 연탄불 위에 양철냄비를 올리고 고추장과 춘장(자장의 원재료)을 풀어 떡을 넣어 판 것이 오늘날 신당동 떡볶이의 진짜 원조다."

-조건희 박훈상 기자, "신당동 떡볶이 '진짜 원조' 마복림 할머니 별세... 며느리도 몰랐던 맛, 다섯 며느리가 잇는다", 동아일보, 2011년 12월 17일.

*국립국어원이 '자장(O), 짜장(X)' 하던 시절이라 기사에 자장면으로 나온다. 일상에서 쓰지 않던 자장이란 말을 신문 방송이 써야했던 시절이다.


마복림 할머니가 그랬듯 알프레드 피트 영감도 혁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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