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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작가 Feb 28. 2020

[3]히피의 커피와 '고어메 게토'

피츠커피와 그 친구들, 그리고 버클리 정신

1966년 알프레드 피트가 버클리캘리포니아대 캠퍼스 옆에 문을 연 피츠커피 매장은 곧바로 지역 핫플레이스가 됐다. 피츠커피에 끌린 고객은 크게 두 부류였다.


첫번째 부류는 버클리와 이 지역 대학에 온 유럽 학생이나 교수, 그리고 유럽에서 좀 살아보거나 여행을 통해 유럽을 경험한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에게 피츠커피는 유럽에서 마셨던 '리얼 커피'였다. 서울에서 먹던 평양냉면 맛이 그리워 엘에이(LA) 가면 한국식당 '모란각' 찾아가는 나 같은 인간들이었을테다(입맛은 '개취'니까 혹시 모란각 냉면 드시고 실망하셨다고 뭐라 하지 마시라). 하여튼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두번째 부류는 마리화나 못지 않게 커피를 좋아했던 히피들(hippies)이었다. 베트남전쟁 시기,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와 사랑, 영적인 만족, 이런 걸 추구한 히피들에게 커피는 위안의 음료였다. 버클리는 샌프란시스코와 더불어 히피 천국, 카운터컬쳐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정권에 맞서 반전시위, 자유언론운동(Free Speech Movement)을 하기도 했고, 또 기성세대에 맞서 자유연애, 정신적 만족, 쾌락을 추구하기도 했다. 새로운 정신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LSD를 투약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마리화나는 불법이었지만 LSD는 불법 약물도 아니었다. 재미있는 건 네덜란드에서 커피상 아버지가 그랬듯,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맨 단정한 차림으로 손님을 맞은 피츠커피 주인장은 자신의 눈에 거지 꼴로 비치는 '자유로운 영혼' 히피들이 영 못마땅했다고 한다.   


어찌됐든 당시 신대륙에서 마시던 대량 생산된 싸구려 커피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커피를 판다는 입소문이 이들을 통해 퍼졌다. 피츠커피 애호가들을 부르는 말도 생겨났다. 피트닉(Peetnik). 1950년대 히피 문학을 의미한 비트세대(Beat Generation) 팬들을 일컫는 비트닉(Beatnik)처럼 피트의 커피(Peet's Coffee)에 빠진 팬이란 표현.


피츠커피 1호점 내부. 사진: 황작가


피츠커피 1호점에 진열된 원두 제품들. 사진: 황작가


피츠커피는 대량생산 제품이 아니라 장인이 한땀 한땀 공들인 아티산(artisan) 제품이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피츠커피 주변으로 다른 장인의 가게들이 들어섰다. 대표적인 곳이 피츠커피와 더불어 버클리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곳, 치즈보드(The Cheese Board Collective)와 셰 파니스(Chez Panisse)다.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피츠커피와 치즈보드, 셰 파니스, 이렇게 세 곳을 중심으로 하는 버클리캘리포니아대 근처 노스버클리(North Berkeley) 지역이 '고어메 게토(Gourmet Ghetto)'로 불리게 된다. 미식가 구역, 미식가 동네, 이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 싶다. 감히 얘기하자면, 버클리의 카운터컬쳐를 음식으로 경험하기에 여기보다 적합한 곳은 없다.


고어메 게토로 불리는 노스버클리. 사진 맨 왼쪽 건물이 치즈보드. 치즈보드 도로 건너편에 셰 파니스가 있다. 피츠커피 1호점은 두 곳에서 걸어서 2, 3분 거리.


버클리 정신을 품은 치즈가게, 치즈보드


먼저 치즈보드. 치즈보드는 가게가 두 곳이다. 치즈와 각종 베이커리를 판매하는 치즈가게가 있고,  바로 옆에 피자가게가 있다. 치즈보드는 1967년 한 부부가 연 작은 매장이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종류의 치즈를 먹던 때도 아니어서 치즈가 귀하던 시절, 부부는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의 고급치즈와 품질 좋은 로컬 치즈를 들여와 판매했다. 손님들에게 시식용 치즈를 제공하며 피드백도 받았다. 자체 평가와 손님 평가가 좋은 치즈를 선별해 판매하면서 장사를 했는데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편이었지만 고급 치즈를 찾는 손님들이 줄을 이으면서 대박을 쳤다고 한다. 장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직원을 채용해야 했을 정도.


그런데 부부는 1971년 장사 잘 되던 치즈가게를 넘긴다. 직원들에게. 지분을 100% 직원들이 소유하고, 의사결정에 누구나 같은 권리로 참여하며, 버는 돈도 모두가 일한 시간만큼 분배하고, 일하는 시간도 최대한 공평하게 나누는 매장을 만들었다. 부부도 한 명의 직원으로 참여했다. 아이디어는 그들 부부가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생활하며 배운 것이었다고 하는데, 다분히 '버클리스러운', '히피스러운' 결정이었다. 주인 혼자 의사결정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사는 가게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이 동등하게 의사결정에 참여해서 공동의 책임으로 꾸려가며, 이를 통해 지역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는 가게를 만들고 싶다는 부부의 철학이었다. 치즈보드는 그렇게 새로 태어났다. 그 시절 히피들이 주도한 협동조합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할까.


요즘도 치즈보드는 장사가 잘 된다. 치즈와 빵을 팔고, 커피도 판매하는 치즈가게도 장사가 잘 되지만 바로 옆에 있는 피자가게(The Cheese Board Pizzeria)는 늘 주문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치즈를 팔다가 빵도 같이 팔자는 아이디어가 나와서 빵도 구워 팔았고, 그러다가 피자도 팔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한다. 직원들이 함께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에 옮겼다. 피자는 1985년부터 구워서 팔기 시작했는데 워낙 인기가 있어 1991년 정식으로 피자가게를 냈다. 이 집 피자는 수많은 버클리캘리포니아대 재학생과 졸업생의 소울푸드가 됐다.

내게는 유학생활을 하며 버클리에서 10년 정도 지내다가 떠난 매제와 남편 따라 와서 5년 정도 살았던 여동생이 있다. 부부는 이 동네에 올라치면 늘 피츠커피와 더불어 치즈보드피자에 들른다. 어쩌다 치즈보드피자 얘기가 나오면 "가장 좋아하는 피자"라고 서슴 없이 추켜세운다. 버클리캘리포니아대를 졸업한 이 동네 친구들에게도 물어보니 소울푸드라고 부를만 했다(물론 피자 맛도 '개취'다).


치즈보드. 각종 치즈와 빵 종류를 파는데, 한쪽에 커피를 판매하는 코너도 있다. 사진: 황작가


치즈보드 피자가게. 메뉴판이 단출하다. 사진: 황작가


직원이 주인인 민주적인 가게 치즈보드. 치즈와 빵은 사먹어 보지 않았지만 피자는 먹어봤다. 우리가 간 날 메뉴는 피망과 양파, 페타치즈, 모짜렐라치즈, 올리브 타프나드(일종의 소스), 그리고 파슬리가 얹어진 피자였다. 다른 종류의 피자는 없다. 딱 하나다. 그날 그날 로컬마켓에서 사들이는 딱 하루치 신선한 재료로 단 한 종류 피자만 만든다. 음료수, 샐러드도 주문할 수 있지만 피자는 한 판을 달라고 할지, 아니면 몇 쪽을 달라고 할지만 정하면 된다(토핑은 한 종류지만 글루텐 프리 메뉴도 있어 엄밀히 얘기하면 두 종류다). 세금까지 포함해 피자 한 판은 25달러 정도. 서너 명이 나눠먹을 수 있는 크기다. 먹성 좋은 성인 2명에게도 충분한 양이다. 


치즈보드 피자가게에서 산 오늘의 메뉴 피자. 이 피자 먹겠다고 온 사람들의 줄은 거의 끊이질 않는다. 사진: 황작가


민주적인 가게의 피자 맛은? 약간 짭쪼름하면서도 입안에 신선함이 느껴지는 맛이라고나 할까. 점심에 먹고 왔는데 저녁에 생각나는 맛이다. 셀프서비스로 제공하는 약간 매콤하면서도 새콤한 초록색 소스를 찍어먹으면 더 맛있다. 피자가게는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주일에 딱 5일만 점심 저녁 장사를 한다. 일요일 월요일은 쉰다.


캘리포니아 쿠진(cuisine)의 탄생, 셰 파니스


치즈보드 길 건너편에 자리 잡은 2층짜리 프랑스 음식점, 셰 파니스. 엄청나게 비싼 음식점은 아니지만 두 사람이 코스요리를 먹으면서 와인이라도 한 병 마시면 팁과 세금을 포함해 훌쩍 400달러가 넘어가는 곳이다. 맘 먹으면 못 갈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이 맘 편하게 갈 수 있는 식당은 아니다. 이곳이 바로 피츠커피, 치즈보드에 이어 1971년 노스버클리에 문을 연 고어메 게토의 '세 친구' 중 하나다. 


셰 파니스는 미국 음식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대형 식품업체가 판매하는 깡통에 든 식재료나 냉동식재료가 아니라 지역 농부들이 생산한 제철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음식점이 셰 파니스이기 때문이다. 셰 파니스는 수년 간 미슐랭 스타 음식점이었으며 여러 음식잡지에서 미국 최상급 음식점으로 뽑혔다. 


이곳은 미국에선 처음으로 지역 특색(locality)과 분위기를 음식에 구현하기 시작한 음식점으로 평가받는다. 셰 파니스 창업자의 전기 <Alice Waters and Chez Panisse>(2007, Penguin Books)를 쓴 작가 토마스 맥나미(Thomas McNamee)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앨리스는 프랑스어 테루아(terroir)란 말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음식에 담은 테루아는 출발부터 셰 파니스를 다른 음식점과 가장 구분짓는 것이었다."


노스버클리에 있는 프랑스 음식점 셰 파니스. 사진: 황작가 
셰 파니스 전경. 사진: 황작가


셰 파니스 건물 앞에 붙여져 있는 메뉴. 1층은 코스요리를 내는 레스토랑, 2층은 단품요리를 시켜 먹을 수 있는 카페다. 사진: 황작가

셰 파니스는 프랑스 음식에 푹 빠진 버클리캘리포니아대 출신 앨리스 워터스가 친구들과 함께 창업했다. 1944년 뉴저지 태생의 앨리스는 어릴 때 가족이 남부캘리포니아(남가주)로 이사하면서 LA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앨리스 워터스는 고교 졸업 후 샌타바바라캘리포니아대(UC Santa Barbara)에 진학했는데, 1964년 버클리캘리포니아대로 옮겼다. 그리고 1965년 8개월 가량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서 산다. 바로 그 기간 동네 시장에서 파는 신선한 야채와 고기로 만드는 프랑스 요리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됐다. 1967년 1월 대학을 졸업했는데, 프랑스풍 음식점 웨이트리스 등을 거쳐 1971년 셰 파니스를 열었다. 셰 파니스는 창업자 앨리스 워터스가 좋아하는 프랑스 영화에 나오는 배역의 이름(Panisse)에서 따왔다. '파니스의 집'이란 뜻이다.


앨리스 워터스는 프랑스에서 자신이 맛본 그런 음식처럼 지역 농부들이 생산한 신선한 야채와 과일, 고기를 재료로 만드는 제철음식을 만들려고 했다. 당연히 그 무엇보다 식재료가 중요했다. 처음 셰 파니스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신선한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안정적으로 물량을 공급받는 건 꿈도 못꾸는 상황. 재료를 구할 수 없으면 직원들이 직접 수렵, 채집을 했을 정도라니 짐작이 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셰 파니스가 친환경, 유기농 방식으로 재배해 알맞게 익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부들과 직거래를 하게 된 것도 결국 그런 이유때문이었다. 


셰 파니스는 재료비가 많이 들어도, 수지타산이 안 맞아도, 농부들에게 적정한 가격을 지불하고 식재료를 사들여 음식을 만들었다. 돈을 못 벌어도 음식의 품질과 타협할 수 없다는 앨리스 워터스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 이제껏 캘리포니아에서, 아니 미국에서 맛보지 못한 음식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유명해졌다. 명성에도 불구하고 개업하고 30년 가량 돈 못벌고 겨우 생존한 이유이기도 했다. 셰 파니스를 거쳐 간 앨리스 워터스의 친구들은 이런 정신을 반영한 빵집, 카페, 레스토랑 등을 열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을 거점으로 '셰 파니스의 아이들'이 점점 늘었다. 그들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제철 재료를 이용한 신선한 요리를 만드는 '캘리포니아 쿠진' 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었고 이는 미국 음식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셰 파니스는 특정한 음식을 정해놓고 그에 맞는 재료를 찾는 식당이 아니라 제철 재료를 이용해 그에 맞는 요리를 만드는 음식점이었다. 리얼 푸드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제철 재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창업자 앨리스 워터스의 철학이었다. 셰 파니스를 주제로 버클리캘리포니아대에서 'Open Innovation Ecosystem: Chez Panisse Case Study'(2013)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쓴 김소형 박사(현 스탠퍼드대 디스쿨 푸드디자인 이노베이션 리서치 부문 디렉터). 김 박사의 논문 결론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앨리스 워터스는 일관성 있게 품질 중심의 혁신을 추구했다. 셰 파니스가 높은 품질의 재료를 공급해줄 믿을 만한 파트너를 찾는 게 가능했던 건 그 덕분이었다. 셰 파니스와 앨리스 워터스는 파트너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비전을 공유하고 교육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예컨대 (메뉴를 정해놓고 식재료를 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식재료를 중심으로 정하는 메뉴처럼, 그들이 함께 이룬 혁신은 손님들을 만족시켰을 뿐 아니라 식재료를 공급하는 사람들에게도 더 많은 수익을 안겨줬다. 식재료를 공급하는 사람들은 셰 파니스라는 음식점에 식재료를 공급하며 공동 브랜딩으로 수익을 늘릴 수 있었다. 이러한 오픈 이노베이션 과정은 제품과 서비스 뿐 아니라 가치까지 함께 창출해냈다."


고어메 게토, 이름의 유래


피츠커피를 시작으로 치즈보드, 셰 파니스가 들어서면서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노스버클리에 고어메 게토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름의 유래를 놓고 이런 저런 설이 많은데,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이는 건 당시 치즈보드 직원이 농담처럼 붙인 명칭이었다는 얘기다. 버클리 음식문화와 역사에 대해 글을 써온 작가이자 치즈보드 초창기에 일했던 엘 존 해리스(L. John Harris)의 회고다.


"(셰 파니스 요리사였던) 빅토리아 와이즈가 1973년 피츠커피, 셰 파니스, 치즈보드가 있는 지역에 수제 햄 소시지 전문점을 열었다. 매일 같이 한바탕 우스개를 늘어놓던 치즈보드 (동료) 직원이자 코미디언이었던 대릴 헨리크가 그 별명을 지었다. 둘을 일행(company)이라 하고 셋을 무리(a crowd)라고 부른다면 넷은 확실히 게토(a ghetto)이긴 하다."


싸구려 커피가 대세였던 미국에 진짜 커피 맛을 보여주겠다며 고급 커피 원두를 판매한 피츠커피, 치즈가 생소하던 시절 맛 있는 고급치즈로 승부한 치즈보드, 수지타산이 맞든 말든 신선한 재료로 만드는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겠다며 문을 연 셰 파니스. 세 친구가 모인 노스버클리는 그리하여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는 동네, 고어메 게토로 불리게 됐다.


*다음편은 이번 주말까지 올려보겠습니다!


<참고자료>

-The Cheese Board Collective, "Cheese, Bread, and Thou", Yes! Magazine, July 17, 2004, https://www.yesmagazine.org/issue/good-life/2004/07/17/cheese-bread-and-thou/.

-Doug Oakley and Paul Burgarino, "Cheese shop founder dies in Minnesota", East Bay Times, April 17, 2008, https://www.eastbaytimes.com/2008/04/17/cheese-shop-founder-dies-in-minnesota/.

-Thomas McNamee, Alice Waters and Chez Panisse, 2007, Penguin Books.

-So Hyeong Kim, 'Open Innovation Ecosystem: Chez Panisse Case Study', PhD Dissertation(Science and Mathematics Education Graduate Division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2013), https://escholarship.org/uc/item/3jq7x9s2.

-L. John Harris, "Opinion: So, Wrecking Ball Coffee, you don’t like the name ‘Gourmet Ghetto’?", Berkeleyside, September 11, 2019, https://www.berkeleyside.com/2019/09/11/opinion-so-wrecking-ball-coffee-you-dont-like-the-name-gourmet-gh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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