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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작가 Mar 12. 2020

[5]파머스마켓의 커피, 블루보틀

손수레에서 내린 커피로 명성을 얻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종종 찾는 곳이 북동부 해안가에 있는 페리빌딩(Ferry Building)이다.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빼놓지 않고 가는 피셔맨스워프(Fisherman's Wharf)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유서 깊은 건물이다.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페리플라자). 사진: 황작가

1898년 문을 연 페리빌딩은 오랫동안 주민들의 발이 돼 준 여객선 선착장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3면이 바다. 동서남북으로 보면 남쪽으로만 내륙으로 연결돼 있다. 서쪽은 태평양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북쪽으론 금문교, 동쪽으론 베이브리지(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브리지)를 통해 내륙과 연결돼 있다.


금문교가 개통한 건 1937년 5월의 일이다. 그보다 6개월 앞선 1936년 11월 베이브리지가 개통했다. 당연히 두 다리가 놓이기 전 샌프란시스코와 북부, 동부 내륙을 왕래하는 수단은 여객선이었다. 한 때 하루 5만명의 승객이 페리빌딩을 거쳐 샌프란시스코를 오갔다고 한다. 당시 페리빌딩은 교통의 허브로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그렇듯 영원한 건 없다. 금문교와 베이브리지가 개통한 뒤 페리빌딩은 명성을 잃었다. 영국 밴드 버글스(The Buggles) 노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에서 라디오의 시대가 저물고 비디오의 시대가 왔듯 자동차는 여객선을 밀어냈다. 선착장 이용객은 급속히 줄었고 페리빌딩 빈 사무실에는 회사들이 입주했다. 그렇게 쇠락한 페리빌딩은 하지만 이후 로컬푸드와 농산물, 특산물을 판매하는 마켓으로 거듭났다.

  

페리빌딩은 시쳇말로 '힙한 곳'이다. 내부는 뉴욕의 첼시마켓을 연상시킨다. 다양한 로컬푸드, 수공예 제품 등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데, 첼시마켓보다 규모는 작지만 근사한 건 다르지 않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어도 장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빌딩 외부엔 인근 지역의 신선한 농산물을 생산자가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직거래장터인 파머스마켓이 차려졌다. 여전히 주변 지역을 왕래하는 여객선이 운항하지만 페리빌딩은 이제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Ferry Plaza Farmers Market)으로 불린다.  

 

저렴함이 아닌 신선함을 파는 곳, 파머스마켓


캘리포니아는 파머스마켓의 천국이다. 연중 온화한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에선 동네마다 파머스마켓이 매주 열린다. 그런데 파머스마켓은 물건을 결코 싸게 파는 곳이 아니다.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파머스마켓을 찾는 주민은 없다. 왜? 가격이 싸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신선한 제품, 질 좋은 상품을 판다.  


파머스마켓의 신선함을 어떻게 정의할까. 과일을 예로 들자면 파머스마켓에선 덜 익은 과일을 판매하지 않는다. 농부들은 충분히 판매할 만큼 익은 과일을 따서 갖고 나온다. 그리곤 농장 이름을 걸고, 농부 이름을 걸고 판다. 파머스마켓에선 대체로 농약을 쓰지 않거나 유기농 방식으로 재배한 과일, 야채 등을 판매한다. 소량으로 제때 수확한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아야 하니 가격은 싸지 않다. 싸선 안 된다.


그런데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은 버클리의 프랑스음식점 셰 파니스(3편 참조)와 떼어놓을 수 없다. 농부들이 대형음식점 요구에 맞춰 낮은 단가에 대량으로 농산물을 공급하던 시절, 값을 제대로 쳐 줄테니 충분히 자란, 알맞게 익은 농산물을 제공해 달라고 설득하며 농부들과의 직거래 네트워크를 만들어 간 곳이 셰 파니스였다. 그리고 셰 파니스에서 식자재 공급을 담당하다가 그만두고 버클리캘리포니아대에 진학해 농경제학을 공부한 시벨라 클라우스(Sibella Klaus)가 주도해 1990년대 초반에 만든 곳이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이었다.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 사진: 황작가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의 야채노점. 사진: 황작가

미국 음식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 셰 파니스 생태계를 연구한 스탠퍼드 디스쿨 김소형 박사의 논문에 나오는 관련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셰 파니스 전직 식자재 담당 시벨라 클라우스는 대학에서 여름방학 프로젝트로 지역 농부들과 셰프들을 잇는 네트워크를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인연을 맺은 농부, 셰프들과 함께 페리빌딩 주차장에 파머스마켓을 열게 해달라고 샌프란시스코 시에 요청한다. 하지만 시에선 거부. 그러자 시위를 하는 차원에서 하루짜리 파머스마켓을 연다. 여기에 유명음식점과 농부들, 식료품 등을 만드는 장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1만명이 넘게 몰린다. 그러자 시가 파머스마켓을 허가한다. 이 과정에 셰 파니스는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셰프들이 식재료를 사러 오는 곳, 품질을 인정 받은 농부와 식료품 수공예품 장인 등이 좌판을 벌리는 곳, 제값을 받고 질 좋은 제품을 사고 파는 곳,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이 즐겨 찾는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은 그렇게 생겨났다.


파머스마켓 노점에서 시작한 블루보틀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의 빌딩에는 두 개의 블루보틀 매장이 있다. 둘 다 일종의 키오스크(kiosk) 매장이다. 평일에도 손님이 이어진다고 하는데, 주말에 가보면 건물 내에서 가장 인기 많은 매장이란 걸 실감할 수 있을 만큼 손님이 많다. 많은 손님들이 스마트폰과 카메라로 '인증샷'과 동영상을 찍는다.

페리플라자 바깥 도로쪽에 있는 블루보틀 매장. 사진: 황작가
페리플라자 내부에 있는 블루보틀 매장. 사진: 황작가

블루보틀이 처음부터 건물에 매장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시작은 빌딩 밖이었다. 페리빌딩 내부에 상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승합차, 트럭에 물건을 싣고 와 간이매장을 차리는 파머스마켓에서 시작했다. 파머스마켓은 동네에 따라 평일에도 장이 선다. 하지만 토요일 오전에 서는 장이 가장 인기가 있다.  


블루보틀 창업자 제임스 프리먼은 에스프레소 장비를 실은 수레에서 자신이 로스팅한 원두와 그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 커피음료를 팔았다. 가게를 차릴 돈이 없는 가난한 커피 상인이 꿈을 이루기 위해 차린 가판대였다. 처음엔 직접 커피를 내려 팔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시장에서 커피를 내려서 파는 사람들에게 볶은 원두를 팔았는데, 가장 맛있게 커피를 내리는 방식을 직접 현장에서 가르쳐주다가 아예 가판대를 인수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 시작은 샌프란시스코 이웃의 오클랜드 파머스마켓이었다.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은 샌프란시스코라는 나름 대도시에 있는 시장. 대도시 시장에 진출하기 전 변두리 시장에서 먼저 경험을 쌓았다.

 

“내 목표는 토요일에 열리는 샌프란시스코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에서 가판대를 배정받는 것이었지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야 한다는 충고에 우선 금요일마다 열리는 올드 오클랜드 파머스마켓에 나갔다.”


오클랜드의 파머스마켓에서 경험을 쌓던 프리먼은 2003년 후반 커피 가판대 한 자리가 비어서 신청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프리먼은 자서전격인 <블루보틀 크래프트 오브 커피>에서 당시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을 운영하는 비영리단체(CUESA) 관계자들, 즉 시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로스팅한 원두와 그 원두로 내린 커피를 제출하고 다른 신청자와 경쟁했을 때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나는 그 자리에 지원했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받았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다른 로스터도 테스트를 받으러 오는지는 미처 몰랐다. 상대는 굉장히 세련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며 손수레에 깔끔한 쇼핑백을 잔뜩 쌓아서 가져왔다. 그놈의 손수레! 왜 나는 그 생각을 못했지? 시장 측은 우리가 제출한 커피를 다른 방에 있는 평가단에게 가져갔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합격 소식을 통보 받았다.”


그에게 기회를 준 CUESA는 앞에서 언급한 셰 파니스 출신의 시벨라 클라우스가 셰 파니스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단체. 김소형 박사에 따르면 제임스 프리먼은 셰 파니스 커피를 로스팅하며 지역에서 명성을 얻어갔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런 관계가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 자리를 얻는 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제2의 기회를 찾는 외골수로 가득 찬 곳, 파머스마켓

 

프리먼이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에 처음으로 커피 카트를 끌고 나온 날은 2003년 12월 13일 토요일이었다. 현재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은 매주 화요일, 목요일에도 장이 열리지만 여전히 가장 큰 장이 열리는 요일은 토요일이다. 그는 블루보틀 블로그에 쓴 글에서 그곳에 나갔던 첫 번째 토요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사업을 시작하고는 1년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 시장에 들어가는 건 오래 품어왔던 꿈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여태껏 맛보지 못한 최고의 커피로 놀래켜 주고 싶었다. 시장은 나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생존하려는 사람들, 제2의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들, 한 가지 밖에 모르는 외골수. 그리고 돈도, 외부의 도움도 별로 없지만 뭔가 놀랍도록 맛있는 걸 만들기 위해 일찍 일어나서 고되게 일할 준비가 돼 있는 그런 사람들. 나는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프리먼의 커피는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에서 인기를 얻었다. 한 잔 한 잔 공 들여 내리는 그의 커피를 맛보기 위해 사람들은 카트 앞에서 길게 줄을 섰다. 오직 맛, 실력으로 승부해서 인정 받은 경험이었다. 이후 블루보틀이 샌프란시스코 골목 건물 차고에 간이매장을 내고, 다시 정식 카페까지 낼 수 있었던 건 파머스마켓에서 얻은 경험과 명성에 기반한 것이었다.  


지금도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엔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카트에 싣고 나와 '제2의 제임스 프리먼', '제2의 블루보틀'을 꿈꾸는 사람들이 손님을 맞는다. 파머스마켓의 노점은 그들이 맛과 실력으로 냉정한 평가를 받는 기회의 장소다.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의 사이트글래스 커피 카트. 이 커피는 트위터 창업자 잭 도어시가 투자하면서 최근 급성장했다. 사진: 황작가

<참고자료>
Hudson Pacific Properties, “The Ferry Building Story”, https://www.ferrybuildingmarketplace.com/about/.

제임스 프리먼, 케이틀린 프리먼, 타라 더간, 블루보틀 크래프트 오브 커피, 유연숙 옮김, 한스미디어, 유연숙 옮김, 2016.

James Freeman, “Celebrating 11 Years of Farmers Markets”, Blue Bottle Coffee website, May 4, 2014, https://blog.bluebottlecoffee.com/posts/celebrating-11-years-of-farmers-markets.

-So Hyeong Kim, 'Open Innovation Ecosystem: Chez Panisse Case Study', PhD Dissertation(Science and Mathematics Education Graduate Division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2013), https://escholarship.org/uc/item/3jq7x9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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