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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량 Aug 11. 2023

노점상 여고생, 동대문을 사로잡는 도매상이 되다

(주)영그룹컴퍼니 대표 유다영 인생소개서


17살, 처음으로 길거리에 좌판을 깔고 장사를 시작했다는 말에 일단 반하고 말았습니다.


17살이라니!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다니!

아, 나는 그때 공부하기 싫어서 어떻게 빠져나가나 그런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돈을 벌어봐야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구나.

이 얼마나 생산적인지~


노는 데 빠져 시간을 때우는 게 아니고

공부 말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찾아보겠다는 생각,

길거리에 나가 뭔가를 팔아볼 용기,

당장 행동에 옮기는 미친 실행력,

자본주의 하에서 이런 사람이 사업을 하는 겁니다 네네


'코코플라이'라는 헤어 액세서리 도매업을 운영하는 (주)영그룹컴퍼니의 유다영 대표.

항상 사업가들을 만나며 느끼지만, 제가 많이 배울 수 있어 너무 좋아요.

그래서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정말 즐겁게 얘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일 저지르는 데는 한 재주 있는 울산 여고생이 사업가가 되기까지의 인생소개서,

지금 시작할게요.






노점상 여고생, 동대문을 사로잡는 도매상이 되다

(주)영그룹컴퍼니 대표 유다영 인생소개서



제가 할 수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17살 길거리 좌판에서 시작해
헤어 액세서리 심장부인 서울 동대문에서 인정받기까지
돈도 백도 없던 저도 해냈습니다.

더 많은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함께 풍요로워지는 길을 만들어 나갑니다.



촘촘하게 꽂은 리본은 로맨스판타지 여주의 파티복에 어울릴 듯~ 아 색깔은 더 화려하게 바꾸고요 ㅎ



33살, 드디어 서울 동대문 입성


‘서울에 아무 연고도 없는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혹시 매장 월세도 제대로 못 내면 어떡하지?

이번에 안 되면 헤어액세서리 사업에서는 손을 떼자…….’


서울로 오기 전날 잠자리에서 한참을 뒤척였다.

걱정, 불안, 설렘, 기대 그리고 비장한 결심까지 온갖 감정이 교차했다.


16년 동안 울산에서 헤어 액세서리 도소매업을 해오면서 늘 서울에 사무실을 열고 전국을 제패하리라 꿈꾸었다.


하지만 막상 서울로 갈 때가 되니 두려웠다.

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던 엄마도 없고, 사랑하는 울산 직원들도 없이 홀홀단신 나홀로 가려니 외롭고 서글픈 마음이 불쑥 들었다.


그래도 다른 길은 없었다.

한번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어떻게든 그 길을 갔지 포기한 적은 없었다.


‘아직 33살이잖아.

처음 장사했을 때처럼 신나게 해보는 거야.

그땐 그저 사람들이 예뻐지는 게 좋아서 했잖아.

내가 신나게 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끌려올 거야.’


사업 경력은 길었지만 아직 난 젊었다. 제로에서 다시 시작한다 해도 내 밥벌이는 충분히 해낼 자신이 있었다.

다만 빨리, 크게 성공하려는 욕심이 그간의 어려움을 불러왔을 뿐.


그렇게 나는 두려움을 이기고 서울로 올라왔다.



공부가 싫어서 시작한 사업


언제부터 사업을 시작했냐는 말에 17살부터 시작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어릴 때부터 장사 수완이 뛰어나거나 사업가로서 엄청난 야망을 불태운 건 아니었다.

학교 공부는 흥미가 없었고 뭘 하면 재미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액세서리를 팔아보기로 한 것이다.


당시 한창 외모를 꾸미는 데 열중하던 시기라 옷이며 화장이며 액세서리며 두루두루 관심이 많았는데, 친구들은 항상 내가 산 액세서리를 물어보곤 했다.


“다영아, 이 귀걸이 어디서 샀어? 처음 보는 디자인인데 너무 이쁘다!”

“다영! 주말에 나랑 쇼핑 가자! 나한테 어울리는 옷이랑 액세서리 좀 골라줘. 네가 코디해주면 남친 반응이 좋더라 흐흐.”

“다영아, 나한테 이게 어울려 아님 이게 어울려? 조언 필요!”


어느새 친구들 사이에 나는 코디네이터로 알려져 있었고, 내가 파는 거면 다 사겠다고 농담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서 재미삼아 물건을 팔아보면 좋겠다 싶었다.

인터넷으로 부산의 액세서리 도매처를 알아보고, 엄마에게 100만원을 빌려 잘 팔릴 것 같은 귀걸이와 목걸이를 사왔다.


노점상 위치는 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엄마는 울산 시내인 삼산동에서 에스테틱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엄마의 매장과 가까운 H 백화점 앞을 추천했다.

백화점 앞이니 유동인구가 많고, 또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가 도와주러 바로 나올 수 있으니 좋겠다고 했다.


장사 첫날 벨벳 천을 깔고 집에서 꼼꼼히 닦아 반짝반짝 빛나는 액세서리를 꺼내 보기좋게 진열하자, 사람들이 흘깃흘깃 보기 시작했다.

당시 울산에는 노점상이 거의 없던 때였고 더군다나 어린 학생이 뭔가 파니까 신기해서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놀랍게도 첫날 매출은 30만원이었다.

태어나서 만져본 가장 큰 돈이었다.



처음 생긴 꿈, 나만의 의류매장


하루하루 신이 났다.

장사가 잘 되기도 했지만 장사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공부 말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걸 발견해서 기뻤고, 그 일이 돈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


주요 고객층은 20대~30대 언니들이었다.

주변의 미용실 오가는 길에 들르는 분이 많았고, 백화점 직원분들도 자주 찾아주셨다.


지금도 잘 웃지만, 그때는 매일이 그저 행복하고 감사해서 늘 싱글벙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손님 중에 물건이 마음에 드는데 돈이 없다고 하면, 그냥 물건을 내주면서 다음에 달라며 흐흐 바보처럼 웃을 정도였다.


물론 어려운 점도 많았다.

귀걸이, 목걸이가 가장 예뻐 보이도록 펼쳐놓는 데만 1시간 반이 걸리는데, 강풍이 불어서 애써 진열한 액세서리가 다 흐트러지거나 갑자기 비가 와서 허둥지둥 좌판을 접을 때면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소나기가 오면 좌판을 접으며 혼자 엉엉 운 적도 여러 번이었다.


여름에는 찌는 듯이 덥고 겨울에는 동상에 걸릴 정도로 춥고. 매장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땡볕 아래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발밑에서부터 열기가 올라오면서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한번은 한여름 너무 더워 아이디어를 낸 것이 세숫대야에 찬물을 받아놓고 발을 담그는 것이었다.

계곡물에 발 담그는 게 떠올라 시도해봤는데, 너무 시원해 여름에는 내내 세수대야를 끼고 살았다.


노점상은 계속 매출이 오르며 좌판에서 다음 해에는 수레형으로, 그 다음해에는 트럭형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겨울에는 추위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외투를 단단히 껴입고 핫팩으로 손을 녹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게다가 장사가 잘 되자 방해꾼들이 생겨났다.

노점이 잘 되면서 이를 시기한 이들이 신고를 하거나 노점 앞에 차를 대 장사를 어렵게 하기도 했다.


‘딱 2000만원만 모으자!

그 돈으로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나만의 옷가게를 하는 거야.’


처음으로 꿈이 생겼다. 엄청나게 넓지 않아도 나만의 가게를 가지고 싶었다.


당시 일매출 50~100만원에 달할 정도로 돈이 잘 벌렸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번 돈을 은행에 입금하지 않고, 집에 고스란히 들고 가 만원 다발로 돌돌 묶어 침대 아래 상자에 보관했다.

그 상자만 봐도 흐뭇했고, 곧 내 가게를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에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라보탑차 판매가 부른 전환점


의류매장을 준비하면서 특이한 의뢰 하나를 받았다.

내가 장사하는 모습을 눈여겨봐두었던 의류매장 한 군데에서 자신도 트럭으로 액세서리를 팔고 싶다고 트럭 의뢰를 한 것이었다.


“다영씨, 나도 트럭에서 액세서리를 팔아보고 싶은데, 트럭 하나 만들어줄 수 있어?”

“예? 액세서리 떼오는 거나 진열하는 거는 제가 아는대로 알려드릴게요. 근데 트럭을 만들어 달라고요?”

“응. 다영씨 트럭이 유난히 눈이 가잖아. 내가 트럭을 사서 꾸미면 다영씨 감성의 디자인이 안 나오니까. 아예 다영씨가 트럭을 꾸미고 액세서리 상품까지 다 채워서 주면 좋을 것 같아.”

“음, 그럼 제가 한번 해볼게요.”


이렇게 해서 내가 운영했던 트럭보다 더 진화한 모델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가장 신경썼던 점은 진열에 펼치고 접는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었다.


장사하면서 이 점을 해결할 방법을 오래 고민해왔기에, 라보탑차에 접이식 진열대를 붙이면 되겠다는 아이디어가 바로 떠올랐다.

차량 문을 열면 진열대가 앞으로 튀어나오고, 문을 닫으면 진열대가 들어가 액세서리를 디스플레이 한 상태 그대로 유지하고 가게를 열고 닫을 수 있었다.


차량 외관은 핑크 계열로 귀엽고 여성스럽게 디자인했다. 초도 물량을 채워두고 앞으로도 물량을 공급해주기로 하면서 라보탑차를 1000만원에 팔았다.


그러자 그 라보탑차를 보고 다른 의류매장에서 또다시 트럭을 의뢰했고, 두 대를 연달아 판매하자 갑자기 이게 더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보탑차



소비자 대상으로 매장을 운영할 게 아니라 소매업자 대상으로 액세서리를 팔면 어떨까?
나도 물건 한번 떼올 때 200~300만원치를 사는데, 이런 고객 100명만 있으면 2~3억 매출이잖아?



당시 액세서리 쪽 도매업자 분들은 연령대가 꽤 높았다.

젊은 분이 40대 정도였으니, 20대인 내가 트렌디하게 상품을 큐레이션하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또 당시는 ‘스타일난다’가 뜨기 시작하면서 소매업은 경쟁이 매우 치열했는데, 도매업은 그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지 않으니 해볼만하다 싶었다.

생각할수록 액세서리 도매업은 매력적이었다.


성남동에 마련한 3평짜리 의류 매장은 장사가 잘 됐다.

의류나 액세서리 외에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많아 매장의 벽지, 전등, 소품, 매대 하나하나 내 손으로 골랐는데, 손님들 왈 유난히 우리 가게가 눈에 띄어 들어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보탑차 판매로 인해 액세서리 도매업으로 마음이 기울자, 의류매장은 왠지 스케일이 작게 느껴졌다.


1년 후 가게를 정리하고는 나는 사무실을 얻어 한번도 도전해본 적 없는 도매업 전문 쇼핑몰을 준비했다.



도매업의 시작, 코코플라이


35평 드넓은 사무실에 달랑 컴퓨터 한 대만 놓고 쇼핑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단 물건을 확보하고, 카메라를 사서 상품 하나하나 사진을 예쁘게 찍었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지고 책을 사서 혼자서 쇼핑몰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겁도 없지만, 그때는 반드시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혼자서 홈페이지를 완성하고 노점 창업 관련 카페와 밴드에 홍보글을 올렸다.

광고비를 쓰는 건 호사였기에 한땀 한땀 온전히 내 노동력만으로 홍보를 했는데, 감사하게도 홈페이지 유입되는 사람이 생기고 주문자가 한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소매업자 고객이 늘어나가던 어느 날, 무역업을 하시는 거래처 대표님 한 분이 중국에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다.


“다영씨, 나랑 이우 한번 가보지 않을래?”

“네? 이우요?”

“거기 푸텐 시장이라고 세계에서 제일 큰 시장 중 하나가 있어. 거기서 다영씨가 수입해올만한 액세서리도 보면 어떨까 해서.”

“아, 가보고 싶어요!”


중국에 가니 이건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일주일을 봐도 다 못 볼 정도로 상품 종류가 다양했고, 가격은 국내에 비해 훨씬 저렴했다.

심장에서 이건 기회라고 강하게 외쳤다.



앞으로 액세서리는 내가 전국 제패할 수 있겠다!



당시 매출은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도매업은 마진이 너무 박했다. 도매 단가가 높았기 때문에 소매업자들이 수익을 내려면 비싸게 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중국은 가격이 너무 저렴했기 때문에 수익률을 충분히 높일 수 있는 기회였다.


팔릴만한 상품을 알아보는 안목은 자신 있었다.

내가 상품을 잘 골라서 유통 규모를 늘인다면 국내 최고로 올라설 수 있겠다 싶었다.


중국 시장에 완전히 반해 다음달에는 무려 한달 내내 중국에서 물건을 살피고 수입할 물건을 정했다.


이후 구매처를 중국으로 바꾸고 액세서리와 함께 기존 고객들에게 반응이 좋았던 인형까지 함께 수입했는데, 이 인형이 대박이 났다.

티몬에서 인형을 팔았는데 며칠만에 3,000개가 넘게 팔렸다.


언제까지 성장만 할 수 있을 것 같은 날들이었다.


중국 제품 직거래



사회적기업 그리고 처음 겪은 마이너스 성장


2017년 연매출은 3억을 넘어섰다.

매출 규모가 커지는 데 흠뻑 취해 울산에 처음으로 코코플라이 매장을 오픈하고 동시에 스마트스토어 숍을 열며 공격적으로 확장세를 이어갔다.


수입 초기에는 완제품을 주로 들여왔지만, 이후에는 수익률을 더욱 높이기 위해 부자재를 수입해 한국에서 제작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헤어 액세서리의 경우 디자인이 관건이지, 정해진 디자인에 따라 뼈대가 되는 핀에 리본이나 비즈 등을 붙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정도 일이라면,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도 앉아서 할 수 있지 않을까?



3년간 노점상을 하며 내 자신이 사회적 약자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래서 형편이 좀 나아지자 사회적 약자층을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장애인 고용을 알아보면서 주변에 이런저런 정보를 얻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애인과 함께 일하는 것은 생각지 못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다리가 불편한 직원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정신 지체 장애인의 경우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이 있었고 일반 직원들은 같은 직원인데 늘 배려해주는 입장이어야 한다는 점에 불만을 가졌다.


어린 나이에 사업을 하다 보니 나보다 나이 많은 직원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이 불만을 표시할 때 나는 현명하게 중재하지 못했다.

2명의 장애인 직원과 5명의 일반 직원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골이 깊어지면서, 우리는 하나로 단합되지 못했다.


또 7명의 직원을 책임지려 하다 보니, 점점 더 무리하게 취급 품목을 늘었고 수익율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회적기업이 되어 지방자치단체 행사 물품을 납품하게 되면서 LED 머리띠, 선글래스, 야광봉 등 온갖 행사용품까지 매입하다보니 어느덧 아이템이 수백 가지로 늘었다.


매출은 3억이 넘었지만 지역 행사 납품은 마진이 거의 없었고, 점점 더 일은 많지만 정작 순수익은 형편없는 악성 재무구조로 변해갔다.


주위에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취급 품목을 줄이고 직원수도 줄여라, 장애인을 고용하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귀에 들리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다는 것이 너무나 보람찼고, 바로 그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힘을 낼 수 있는 동력이었기에 쉽사리 포기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사업을 접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막상 또 아침에 나와서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대표로서 부족하지 직원들이 무슨 잘못인가 싶어 다시 마음을 다잡곤 했다.


2020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야 처음으로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폐업 전 마지막 결심


창업 후 가장 괴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결국 내 능력 부족으로 직원을 내보내야 하나. 앞으로 사업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어떻게 하면 수익률을 더 높일 수 있을까. 고민이 계속되었다.


2021년 눈물을 머금고 직원들에게 회사 상황을 밝혔다. 장애인 2명을 포함 직원 셋이 떠났다. 코코플라이 매장도 정리했다.

줄일 수 있는 지출은 모두 줄였다.



‘내 사업 인생에서 1막이 끝났다고 생각하자.
2막은 내가 잘하는 부분에만 집중해서 제대로 유다영의 브랜드를 만들어보자.’



내 나이 또래가 가장 좋아할만한 헤어 액세서리로 품목을 집중하기로 했다.

20~30대 여성 타깃으로 마진을 높일 수 있는 고급스런 상품 외 나머지 품목은 모두 정리했다.


매출과 수익이 별개일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기에, 유통 방식도 미리 대량으로 물량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제작’에 초점을 맞췄다.

팔릴만한 상품을 전시해놓고, 소매업자가 대량 주문하면 그때 제작에 들어가야 창고에 쌓인 물품으로 허덕이며 재고 처리에 골머리를 앓는 일이 없을 것이었다.



최대한 많은 소매업자를 만나려면 서울에 가서 내 역량을 시험해보자.
전국 소매업자들이 몰려오는 동대문에서 자리잡지 못하면 어차피 내 경쟁력은 한계가 있는 거야.
잘 되면 확실히 성장할 거고, 안 되면 깨끗이 포기하고 다른 사업을 해보자.



비장한 결심을 하고 서울행을 결심했다.


2.5평짜리 수백 개의 도매업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대문.

그야말로 도매상들의 접전지였다.

그 많은 업체 중 소매업자의 선택을 받아야만 했다.


매장을 계약하자마자 인테리어 구상에 들어갔다.

울산에서 첫 의류매장을 열 때 내 손으로 하나하나 가게를 꾸몄던 경험을 바탕으로 바닥, 벽지, 매대, 조명 모두 직접 디자인하고 골랐다.


예를 들어 대부분 매장이 이미 완성된 매대를 구매해 쓰지만, 나는 한눈에 비슷한 톤앤매너의 액세서리를 비교하며 볼 수 있도록 3단 매대를 디자인 해 직접 제작을 의뢰했다.

조명의 경우 대부분 흰색을 쓰지만, 나는 액세서리가 가장 예뻐 보이고 공간 자체가 따스한 느낌이 들 수 있도록 노란색 조명을 설치했다.


못 보던 디자인으로 매장이 꾸며지기 시작하자 주변 상인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영씨, 매대 참 이쁘네. 이런 건 어디서 봤대? 난 처음 보는 스타일이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이 매장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젊으니까 확실히 감각이 있네. 나도 좀 배워야겠어.”


사실 동대문은 굉장히 텃세가 심하다.

새로 진입하는 도매업자는 한동안 무시당하거나 잘 되면 굉장한 시기와 질투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인테리어와 관련해서 내가 가감없이 노하우를 알려주고 조언도 해주자 오히려 주변 상인들로부터 호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이 동대문에 입성한 첫번째 좋은 징조였다.


매장 스케치(왼쪽), 공사중 매장 모습(오른쪽)
동대문 코코플라이 1호점
동대문 진출 후에 요런 좋은 일도 뙇



사업 2막을 열다


놀랍게도 매장을 열자마자 첫날 바로 매출이 났다.

매장을 꾸밀 때부터 눈여겨보던 소매업자가 바로 대량 주문을 했고, 기존의 소매업자 고객도 새롭게 초점을 맞춘 고급 헤어 액세서리 컨셉에 만족하면서 주문량을 늘렸다.

가장 기뻤던 건 명품 브랜드 측에서 로고가 새겨진 헤어 액세서리를 주문했다는 사실이었다.


매출이 커도 수익은 변변찮았던 지난 5년과 달리 매출과 수익이 함께 상승하는 구조로 가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첫달에 목표매출을 달성했고, 석달이 지나자 매장을 하나 더 늘려도 되겠다는 확신이 섰다.


서울로 올라온 지 1년도 안 돼 부자재 매장을 추가 오픈했다.

부자재 매장은 소매업자만 타깃으로 한 게 아니라 1인 창업자를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동대문 코코플라이 2호점 (부자재 매장)



대표로서의 역량이 충분치 않아 장애인 직원과 함께 성장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사업을 통해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늘 그대로였다.


그래서 올해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것이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헤어 액세서리 창업 코스다.


3개월간 교육을 이수하면 바로 창업이 가능하도록 철저히 실습 위주의 커리큘럼을 짰다.

매 수업시간 마다 2개씩 총 32개의 가장 인기 있는 헤어 액세서리를 만들어보는 것은 물론, 15년 동안 액세서리업을 해오며 확보한 거래처와 판매 비법까지 나의 모든 노하우를 공유할 예정이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창업자의 경우 매장 인테리어 컨설팅까지 계획하고 있다.


서울에 와서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을 하게 된 것이 오늘의집 멤버가 된 것이다.

서울 월세방을 내 취향대로 꾸미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렸는데, 국내 최대 인테리어 플랫폼인 오늘의집 측에서 인테리어 감각이 돋보인다며 오하우스 멤버가 돼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다양한 인테리어 소품을 협찬받는 대신, 그 소품이 집안에 잘 어울리도록 진열하고 사진이나 영상을 올려주는 일이었다.


울산에서 가족과 함께 넓은 집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5평짜리 원룸에서 자취하게 되면서 방이라도 예쁘게 꾸며서 살자 싶었던 건데, 그것이 또 새로운 기회로 이어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인테리어 전문가들에게 내 안목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 안목으로 창업자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오늘의집 오하우스 멤버의 인터리어 수준이란~ 잡지 보는 줄 ㅎㅎㅎ 벽에 붙은 엽서 하나, 화분 하나, 천조각 하나도 감각이 묻어나네요



가장 큰 행복은 ‘함께 성장하는 것’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듯했던 5년을 보내고 서울에 올라와 다시 회사가 성장세를 그리면서 직원, 파트너, 고객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이전에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직원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다 내가 부족해서임을 알게 되었다.

남 탓 할 게 아니라 자기관리가 먼저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후에는, 스스로를 갈고 닦는 공부를 많이 했다.


그중 가장 마음 깊이 박혔던 법문이 ‘컵의 원리’였다.


두 사람이 컵을 만들러 간다.

한 사람은 단지 생계비를 벌기 위해 컵을 만들고, 다른 한 사람은 컵을 쓰는 사람을 위해 컵을 만든다.
두 사람은 일하는 시간도 같고 받는 월급도 같다.

하지만 3년이 지나면 이 두 사람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지게 된다.

돈을 벌기 위해 컵을 만드는 사람은 일하는 것이 전혀 즐겁지 않고 스트레스가 된다.
일이 끝나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돈을 쓰며 즐길거리를 찾기 바쁘다.
컵을 만드는 기술은 3년이 지나도 제자리다.

다른 한 사람은 일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겁다.
컵을 쓸 사람이 행복해 할 생각을 하면 절로 미소가 떠오르고 아무리 오래 일해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
어떤 컵을 만들면 더 좋아할까 생각하니 아이디어가 무궁무진 떠오르고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재가 된다.


나는 이 이야기 속에 일의 본질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고객을 사랑하면

먼저 내가 즐겁고,

즐거우니 창의가 솟아나고,

고객이 자석처럼 끌려오면서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한다.


나는 직원들이 후자와 같은 마음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저 밥벌이가 아닌 정말로 신나는 일터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가 대표로서 계속 성장하듯, 직원들도 계속 성장해나가며 우리 회사가 하나의 사회학교가 되기를 바란다.


서울에 올라온 후 직원들과 한 가지 새로운 루틴을 만들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하루 3가지 감사한 일을 밴드에 올리는 것이다.

작은 일에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행운이 손짓하기 시작한다.

기분좋은 에너지가 직원들 사이에 퍼져나가고 오늘 하루 힘차게 달려보자 힘을 내게 된다.


17년 동안 사업을 해왔지만 여전히 나는 사업이 너무나 재미있고 점점 더 재미있어진다.

인격적 측면에서도 사업적 측면서도 계속해서 성장하는 매일이 즐겁다.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 앞으로도 나는 계속 그릇을 키워나가는 대표가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액세서리로 전국을 제패할 유다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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