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사나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sanasu Jul 23. 2023

카즈키 효과의 시작

2023.7.12 vs. 포항 @수원월드컵경기장


아직도 술이 취하면 '마나부'를 외친다.


작년 수원삼성에 잠시 머물렀던 사이토 마나부는 수원에 필요한 스피드 축구를 구현하게 만들었다. 23년에 그가 수원에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강등에서 겨우 살아난 팀이 지리멸렬한 플레이에 한가닥 숨을 불어넣는 마나부를 안 잡는다구?


23년 시즌 개죽쓰는 수원의 결과들을 보면서 마나부는 없어도 된다고 결정한 인간 무리들에 대한 적개심이 날이 갈수록 활활 타올랐다. 2월 25일 개막전 이후 7월에 들어선 시간 동안 수원은 홈에서 단 한 번의 승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원정에서만 단 2승으로 단독 꼴찌다. 과거의 명성을 기억하는 팬들은 패닉상태에 빠졌고 나는 이 사태의 원인 중 하나로 마나부의 부재를 지목했다.


포항전을 앞두고 코즈카 카즈키의 영입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나부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J리그에서 데려올 거면 마나부를 뭐 하러 보낸 건지. 그렇게 내 두뇌는 단순한 섭섭함을 가동시켰다. 아는 마나부와 모르는 카즈키 사이에서 아는 마나부가 이 팀에 더 필요하다고만 생각했다.


사진 제공 : 수원삼성블루윙즈 홈페이지


영입되자마자 포항전 선발 출전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 공을 차는 임팩트가 너무 좋다. 선수니까 프로니까 발등을 공에 맞추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이기에 가끔 땅을 차고 공 대가리를 훑을 수도 있건만 이 친구 매번 정확히 찬다. 그러니 힘을 들여 찬 거 같지 않은데도 공이 신선한 속도로 공기를 가른다. 기본기를 연습하고 싶게 만드는 임팩트에 흥분하기는 처음이다.

카즈키 슈팅 연습



경기가 시작되고 카즈키의 비밀문이 열리자 나는 마나부를 잊었다. 마나부에게 미안한 마음도 마나부를 잡지 않은 인간 무리에 대한 적개심도 탱탱한 공이 날아가듯 가볍게 잊혀졌다. 어설픈 견해로 일희일비하는 나의 무지에 대한 창피함도 대수롭지 않았다.


정확한 임팩트를 어디다 사용하나 봤더니 킬패스였다. 줄 곳이 없어 변두리에서만 공을 돌리다 백패스를 남발하던 수원의 선수들이 이제 효과적인 달리기를 시작했다. 카즈키는 과연 그 시야를 어떻게 확보하는지 경이로웠다. 넓은 운동장에는 단 22명의 선수들이 각자의 신체 사이즈만큼 공간을 점유할 뿐이고 나머지 잉여 공간은 훨씬 많다. 카즈키는 아무도 선점하지 않은 그 공간에 동료가 잘 받아낼 수 있도록 정확히 찔러 넣어준다. 어차피 뛰어봤자 뛰는 자신을 보지 못해 허탕만 쳤던 선수들이 기대를 듬뿍 품고 달리기 시작했다. 뛸 거라는 믿음과 줄 거라는 확신이 만났을 때 최적의 타이밍으로 작품이 그려진다.


카즈키의 킬패스를 잘 받을 수 있으면서 잘 뛰는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 바로 아픈 손가락, 전진우다. 후반 15분에 나온 카즈키의 전진우를 향한 쓰루패스는 속도와 스피드에서 가히 완성품이었다. 그런데 골문 앞에서 전진우가 넘어진다. 왜 전진우는 결정적일 때 잘 넘어질까. 저거 또 파울이나 얻어내려고 액션을 취하다가 실패한 거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좋은 패스를 저렇게 가볍게 날려 버리다니...

카즈키 킬패스 받은 전진우 넘어지기 직전


앗, 그런데 심판이 VAR을 보러 간다. 뭔가 접촉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VAR을 보고 심판이 경기장으로 복귀하는데 천천히 걷는다. 판정 번복이 아니면 보통 가볍게 뛰어 오면서 팔을 수평으로 가르며 별 거 아니었다는 표시를 하는데 천천히 걸으며 포항의 한 선수에게 다가간다. 퇴장이다.

VAR 보고 들어온 심판 (뮬황은 이미 공 가지러...)
레드 카드 (이 여름에 포항은 한 명이 없다...)


전진우 왜 넘어지고 그러냐고 말했던 건 입이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 진짜 걸려서 넘어진 거였다. 전진우였기에 위협적이었고, 포항의 수비수를 퇴장시켰고, 그 기회를 뮬리치가 득점으로 연결시켰다.

뮬황의 미친 프리킥


후반 16분 수원이 선제골을 넣었고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포항은 한 명의 선수가 부족했다. 수원의 추가골과 시즌 홈경기 첫승이 힘들지 않게 예상되었다. 나는 빅버드 첫 카니발을 어디서 관람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승리를 확정 지을 추가골은 나오지 않고 예상외로 포항은 공격적인 플레이를 멈추지 않았다. 승리감에 도취되었던 팬들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후반 막판에 골 먹어서 지거나 비겼던 경기가 많았었기에.


불안한 예감은 현실을 정통으로 타격했다. 후반 30분 포항의 공격 중 접촉이 일어났다. 심판은 반응이 없었지만 포항 선수들은 강하게 항의했고 접촉의 당사자인 한호강은 뒤이어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듯했다. VAR을 보고 들어온 심판은 PK를 선언했다.

포항 공격수를 팔로 저지하는 한호강 선수
결국 PK 선언


한 명이 퇴장당한 팀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고도 이기지 못할 수 있다는 상황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홈 첫승과 카니발에 대한 들뜬 기분을 이렇게 눌러버려야 한다구? 양형모가 막아줄 거라는 희망이라도 붙들어야 했다. 그래, 이렇게 놓치면 안 되는 경기지. 다 이긴 경기잖어. 그래, 막을 거야. 카니발을 할 수 있을 거야. 다음날 연차까지 쓰고 왔단 말야. 하이라이트 돌려보면서 출근 걱정 없이 술 마시며 승리를 즐길 거란 말야. 요거 하나만 막으면 돼. 할 수 있어, 수원!


포항의 키커 제카는 세상 가볍게 PK를 다루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폴짝 뛰어오른 게 분명하다. 수원의 승리가 날아갔다. 비긴 경긴데 진 경기를 목도한 것처럼 가슴이 아렸다.

포항 제카의 가벼운 PK


희망고문 같은 거 좋아하지 않는다. 올해의 경기들을 지켜보면서 작년 가까스로 잔류한 팀이 각성한 게 없다는 사실에 분노했었고 이런 정신이라면 차라리 2부로 내려가서 혹독한 단련을 하고 돌아오는 게 나을 거라고 진단했다. 카즈키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카즈키를 알고난 지금 비록 이기진 못했지만 승리가 그리 먼 곳이 아님을 직감하게 되었다. 근거 있는 희망이 가슴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수원 1 : 1 포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