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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sanasu Jul 26. 2023

가장 극적인 증명

2023.7.15 vs. 울산 @수원월드컵경기장


12일 포항전 이후 3일 만의 경기다. 9일, 12일, 15일. 일주일에 세 번의 경기를 치르는 빡센 일정이다. 그러고 보니 1일 대구전 이후 3경기 무패행진이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역겨워하는 성향이지만 수원에 대해서는 무승이라는 부정적인 말보다는 무패라는 긍정적인 말을 쓰고 싶다.


지난 포항전의 결과는 두고두고 아쉬웠다. 포항 수비수의 퇴장과 수원의 선제골이라는 환경적인 조건보다는 그날의 경기력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런 종류의 아쉬움은 다음 경기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환된다. 앞으로 카즈키와 뮬리치가 만들어낼 골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뜨거워져 참을 수가 없다. 무패라는 긍정의 말을 쓴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 상대가 울산이다. 아... 씁.....



장마와 울산이라는 점이 사람들의 발을 집에다 묶어 두었는지 빅버드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그런데 내 안과 밖으로 뭔가 묘한 심리 상태가 형성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을 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솔직히 울산을 이기는 걸 바라면 좀 오바겠고 왠지 지지는 않을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지난번 울산전에서 2골이나 넣으면서 선전을 했던 기억도 있고 카즈키 효과로 팀이 달라졌다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서울이나 전북보다 울산이 오히려 해볼 만하다는 편견이 내 안 깊은 곳에 형성되어 있다.



이번에도 카즈키는 선발이다. 단 한 경기만을 봤을 뿐인데 선발 라인업에 있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수원에 몸 담아 온 주전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볼 터치 정말 탐난다.



뮬리치, 그는 우리가 키가 큰 공격수에게 바라는 것은 주지 않지만 다리가 긴 공격수에게 바라는 것을 준다. 이런 슈팅 타이밍과 속도를 가진 선수를 수원은 가진 적이 없었다.

 


 가보자. 해보자. 할 수 있다. (할 때 됐다...)



선발 라인업. 명준재 간만의 선발이다. 한 골 터지길 바란다. 전진우, 김주찬 두 이름에서 스피드가 느껴져서 좋다. 이기제가 없다. 많이 지쳤을 테니 전반은 쉬고 후반에 나오자 (나와야 한다...)



김주찬의 돌파가 예사롭지 않다. 수비가 다리를 걸려하니 폴짝 넘어간다. 패스를 받은 명준재의 슈팅은 골인 줄 알았다. 기가 막힌 작품이 나올 뻔했다. 아니, 골이 못 돼서 그렇지 작품은 맞다.




역시 카즈키가 일을 벌였다. 넓은 벌판에 툭 던져 넣으니 정승원이 질주한다. 골라인 밖으로 나갔어도 크로스를 올릴 친구다. 슬라이딩하면서 라인 안에서 기가 막히게 올린다. 조현우가 잡기에는 애매한 높이라 가까스로 쳐냈는데 공이 떨어지는 곳에 전진우가 달려온다. 우당탕 뭔가 굴절된 듯한데, 공이 그물을 흔드는 건 멀리서도 보인다. 반 박자 늦게 N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진다. 전진우는 세리모니를 하지 않았다. 순간 예전에 울산 소속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최근에 내가 전진우를 향해 날렸던 욕들이 떠올랐다. 마음이 아팠을 테지. 미안했다. 아픈 손가락에서 이제 벗어나자.

 


다행히 전반전을 리드한 채 넘기고 후반전이 시작된다. 마음은 수원의 추가골이 터져주길 기도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울산의 동점골이 과연 언제 나올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85분 넘어서 어이없게 먹히지만 않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웬일? 수원의 두 번째 골이 터졌다. 공격 중 빼앗겼던 공을 고승범이 과감하게 빼앗는다. 너무 과감해서 울산 선수도 당황해서 공을 뺏긴 듯하다. 이 공이 뮬황에게 굴러가서 얼마나 다행인지. 가차 없다. 박자, 리듬 그런 거 없다. 골키퍼가 준비 자세도 취하기 전에 슈팅을 날린다. 골문 구석에 가서 처박힌다. 경기장이 표효한다.



와~ 진짜 이기는 건가? 그것도 울산을? 그러나 인져리 타임에도 두 골은 먹힐 수 있다. 작년 인천 전에서 먹힌 적이 있다. 정규시간은 다 지나고 추가시간 5분이 주어졌다. 제발 잘 버텨주기만을 두 손 모아 바라고 있는데 김주찬이 중앙에서 드리블을 치고 온다. 사이드에 있는 김경중한테 패스했는데 김경중은 시간을 좀 끌려고 여유를 부리는 기색을 보이다가 앞쪽에 달려드는 김주찬에게 찔러준다. 이건 그냥 김주찬 효과다. 젊은 체력이라 풀타임을 뛰고도 아직 소진할 힘이 남아 있던 걸까. 수비수는 말할 것도 없고 관중까지도 속이는 패인팅을 보여준다. 그 이후로는 김주찬 타임. 이 친구도 가차 없다. 공을 계속 툭툭 치며 스피드를 죽이지 않는다. 김주찬이 쏜 공은 조현우가 막고 있던 니어 포스트를 외면하며 파포스트의 안락한 지점에 꽂힌다.




이런 난리가 없다. 3:0이다. 이젠 질 수가 없다. 울산 바코가 한 골을 넣었지만 수원팬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 경기가 끝났다. 여기저기서 격한 괴성과 울음 섞인 표효들이 난무한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눈이 뜨거워진다.



5개월 기다린 홈에서의 첫승이다. 오래 기다렸으니 다른 팀이 아닌 울산에게서 3점을 따준다. 이거 보여주려고 그동안 온갖 삽질을 했던 것이다. 아, 미친 것들, 진짜.....



지난달 서울과의 슈퍼매치에서 패한 후 자신이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절망적인 표정을 드러냈던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건 그날의 패배에 대한 울분이 아니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인내와 축적되고 축적되었던 실망감들의 폭발이었다. 울산 전의 경기를 본 그 청년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당신도 이 승리에 한몫했다는 사실을 꼭 말해주고 싶다.




카즈키의 효과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골 맛에 중독된 뮬황과 김주찬의 욕망이 더 커져가기를, 그리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집단적인 몸부림을 지켜보며 흥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장 수원다운 곳에서, 가장 수원다운 풍경으로, 가장 진짜의 수원을 증명해 냈다. 바모스,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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