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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sanasu Aug 14. 2023

샘솟는 숙제들 속에서

2023.8.12 vs. 전북  @전주월드컵경기장


자신이 잘 모르거나 흥미가 없는 분야에 대해서는 그것에 관하여 깊게 생각해 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관심 없는 분야를 인생의 중대한 부분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향과 철학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정부가 그걸 짓밟았다. 뭐 축구 몇 게임 나중에 하면 되지,라는 마인드로 축구의 당사자, 관계자, 팬들이 오래전부터 꾸려왔던 계획을 무참히 짓밟았다. 정신만 훼손시킨 게 아니라 실제로 상암 구장의 잔디는 심각할 정도로 짓눌러졌다. 전북의 홈팬들은 원정팀에 대한 조롱 대신 정부를 향한 비판의 메시지를 걸개에 담았다. 축구팬으로서 고마운 저항이라 할 수 있겠다.



전북 원정은 처음이다. 웅장한 녹색 대문이 인상적이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한산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수원팬들이 응집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다들 어디에서 오시는 분들일까. 무더위도 막지 못한 이들의 열정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스타팅 라인업에 뮬리치와 이기제는 보이지 않았다. 양형모도 후보군에 있다. 가즈키가 있음에 안도했다.



웨릭포포는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 못하고 있던데 직접 보고 판단해 보리라. 그나저나 카즈키의 킥은 훔쳐오고 싶다. 뒤에 포포도 보인다. 카즈키와 포포, 오늘의 키플레이어다. 둘 다 잘하면 이길 수 있다. 카즈키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 포포가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선수들이 모였다. 원정이라 주눅 들어 보이기도 하고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 그런데 이길 거 같은 느낌이 강하다. 근거 없이 그런 느낌이 생길 때가 있다. 그래 그래 서로 얘기 많이 하고 격려해 줘라. 나중에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다음 위치를 예측할  있는 팀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일단 오늘은 이기고.




경기가 시작됐다. 그런데 초반부터 이상민 교체되고 포포는 옐로카드를 받는다. 이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겠구나 싶었는데 30분에 수원의 선제골이 터졌다. 카즈키의 코너킥을 한호강이 사뿐하게 헤더로 넣어버린다.



전북을 상대로, 그것도 원정에서 나온 선제골이라 원정석은 또 난리가 났다. 사람들의 머릿속은 카니발을 떠올리는 흥분과 동시에 이전의 숱한 결말들을 상기시키며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모든 설렘과 불안함은 응원의 목소리로 전환한다. 다행히 전반전은 실점 없이 끝났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원정석에서는 청백적 우산이 펼쳐졌다. 우산 아래에 있는 우리들은 직접 볼 순 없지만 전체적인 이 광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짐작할 수 있다. 전북은 한교원, 이동준, 문선민을, 수원은 아코스티를 투입했다. 제대로 한 판 벌어질 것 같다.



웨릭포포의 부정적 평가는 후반에도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덩치와 움직임은 상대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지만 그 위협이 키핑이나 슈팅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수비수의 푸쉬에 이렇게 쉽게 나가떨어지는 모습은 믿기지가 않았다. 굳이  포포일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결국 포포는 고무열과 교체됐고 전북은 구스타보를 투입했다. 그리고 후반 65분 어수선한 공방전에서 전북 한교원이 동점골을 터뜨렸다. 사실 많이 놀랍거나 실망스럽지 않았다. 한 골 먹을 거라고는 각오하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게임의 시작이다. 그런데 아코스티는 피치 밖에 고민거리를 남겨둔 사람처럼 행동이 둔했다. 고승범도 지쳐가고 있었다. 가장 체력 소진이 적었을 고무열은 충격적이었다. 공을 받기 전에 주변을 잽싸게 스캔하는 건 기본자세인데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버렸다.



두 팀 모두 추가 득점 없이 경기가 끝났다. 선수들이 진 경기를 돌려보며 복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매 경기가 하나의 시험이고 틀린 문제를 유심히 살펴야 실력이 느는 것이다. 이건 어떤 기술이나 피지컬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이다. 최상의 컨디션이 아닌 전북을 잡을 수 있는 찬스였는데 수원 선수들의 정신력은 그 찬스를 낚아챌 만큼 단련이 되어있지 않았다.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다음날 강원은 울산을 잡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수원의 홈 첫 승과 강원 신임감독의 첫 승이 공교롭게도 1위 팀 울산전에서 나왔다. 스포츠는 이렇게 묘한 결과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아무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수원은 다시 최하위로 밀려났다. 카즈키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포포와 고무열은 어느 시간대 어느 포지션이 적합할 것인가, 고승범의 체력은 어떻게 유지시킬 것인가, 이기제의 경기 감각은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 등등의 숙제만 잔뜩 쌓여간다. 슈팅이 너무 없다. 망설이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어렵고 복잡한 생각은 경기장 밖에서 하길 바란다. 준비된 선수는 경기장 안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길 간절히 애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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