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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sanasu Apr 03. 2024

서사가 시작되는 곳

2023.6.15


2023.6.15 서울


언제였더라. 내 기준으로는 이미 작가였지만 공식으로 인정받는 작가가 되기 위해 글에 매진하는 사람에게 만년필을 선물로 준 적이 있다. 만년필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성의 있어 보이면서도 너무 부담 주지 않을 가격대의 제품을 찾아보았다. 그 와중에 몽블랑이라는 브랜드를 알게 되었는데 가격으로는 거의 끝판왕에 다름없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나는 이미 설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만년필을 골라 선물해 주면서 나중에 정식으로 등단하는 날 몽블랑을 사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러나 가격보다는 촉의 두께가 그 사람의 취향이 아니었는지 내가 준 만년필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사진 속의 만년필은 과연 어떤 제품일까. 옆에 있는 잉크통이 묵직하고 과묵해 보인다. 뒤쪽에 아웃포커스된 글씨에 무엇인가 설명이 되어 있는 듯한데 제품명과 가격이 쓰인 건지 아니면 만년필의 용도가 쓰인 건지 분간이 어렵다. 그러나 제품이라 하기엔 너무 편하게 놓여 있고 우아한 그 자태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건 사실이다.






사진 속의 만년필은 박경리 작가가 집필할 때 사용했던 몽블랑 만년필이다. 2023년 서울국제도서관의 박경리 특집 부스에 전시되어 있었다. 만년필로 글을 쓰는 사람의 자세는 어떤 형태일까 숙연해진다. 저 만년필의 끝에서 <토지>와 같은 대작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2018년 봄 3개월 동안 <토지> 스무 권을 읽었다. 그 소설을 읽기 전과 후의 나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회사의 대선배님과 토지에 관한 대화를 하며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인간상이 다 들어있는 소설이었다고 말씀드렸다. 박경리라는 작가만이 쓸 수 있었던 소설. 역시나 가격과는 무관하게 대작가의 정신이 스며든 만년필이라 생각하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진다.


2023.6.15 서울 코엑스 국제도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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