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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sanasu Jun 23. 2024

인간이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2024.6.22 vs. 성남FC @수원월드컵경기장


거의 한 달 만의 직관이다. 그 사이 수원의 감독은 변성환 감독으로 바뀌었다. 신임감독 체제에서 3게임을 치렀고 현재까지 2무 1패. 승은 없지만 평은 좋다. 희망을 담는 시각으로 말하려는 팬들의 경향도 있겠지만 경기력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았다. 마지막 코리아컵 포항전의 경기는 내가 봐도 꽤 인상적이었다. 비록 승부차기로 지긴 했지만 답답했던 수원의 버릇들이 많이 고쳐진 느낌이었다.


새로운 감독의 홈 첫 경기를 날씨는 다소 무례한 방식으로 환영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비가 쏟아졌다. 비 예보가 있어서 지붕이 있는 W석에서 관전했지만 바람 때문에 일정량의 비는 계속 맞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날씨 따위에 주춤거릴 수원팬들이 아니다. N석은 일찌감치 매진이고 2층의 좌석까지 오픈했다. 축구인으로서 수원의 감독을 한 번쯤 해보는 것도 인생에 강한 흔적 하나를 남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끝이 다소 매울 수는 있어도.


경기가 시작되자 선수들의 움직임에 눈이 간다. 감독 하나 바뀐다고 팀 전체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런데 선수들 몸에서 풍기는 에너지가 좀 다른 것 같다. 전에 없던 자신감이 묻어 나온다. 뮬리치, 김주찬, 김보경, 이기제, 이종성. 이들의 위치가 왜 그렇게 있어야 할 곳에 딱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암튼 안정적인 느낌에 마음이 놓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내 마음을 더 안심시키려는 듯 전반 25분 뮬리치의 골이 터졌다. 골이 들어가고 뮬리치가 세리모니를 하려다가 멈췄을 때는 오프사이드 선언이 된 거라고 착각했는데 이전에 속했던 팀이 성남FC라서 성남팬들에게 예우를 갖춘 것이었다.


지난 서울이랜드와의 악몽을 경험했기 때문에 한 골을 이기고 있다고 그 경기를 이길 수 있거나 심지어 비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후반전이 되자 전진우와 박승수가 투입됐다. 박승수는 고2라고 하던데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나올 수 있는지 놀라웠다. 어린 시절에 주어지는 특혜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이렇게 빠른 선수들이 피치 곳곳을 헤집고 다니는 축구를 좋아한다. 수원은 그런 점에서 많이 약했기 때문에 백패스가 잦았고 공격이 끊어져 허탈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전진우와 박승수는 일단 스피드로 골을 점유하면서 상대 골문 앞쪽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수원의 골대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의미로서 팀 전체에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게 해 준다.


전진우의 약간은 이기적인 플레이로 시작된 공의 흐름이 김보경의 왼발 슈팅으로 귀결되었다. 나에게는 전진우만큼 아픈 손가락이었던 김보경의 첫 골이 터졌다. 올해 보는 가장 아름다운 골로서 자신의 이름을 다시금 상기시켜 줬다. 나중에 유튜브를 보니 이 골이 터진 순간 변성환 감독이 아이처럼 뛰어다니며 기뻐하는 모습이 있었다. 변성환 감독도 나와 비슷한 감정으로 김보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라고 확신한다. 사실 이날의 결승골은 뮬리치의 첫 골이지만 승리 인터뷰는 김보경이 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첫 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후반 인저리 타임 때 조윤성의 세 번째 골이 터졌다. 이종성의 프리킥과 김상준의 헤더 어시스트에 의한 완벽한 골이었다. 이날 터진 세 골의 결정력이 깔끔했다는 점도 훌륭하지만 골은 넣은 이에게 공이 도달되는 그 과정들이 이미 득점을 보장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만 명이 넘는 수원팬들의 함성이 빅버드를 들썩이게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이처럼 좋아하고 웃는 모습을 보니 죽어서야 방문할 줄 알았던 낙원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선수와 감독, 스태프들이 경기장을 돌며 인사하고 축하받는 그 시간 동안은 아팠던 사람도 통증이 없었을 것이고 일상의 잡다한 고민에 매몰됐던 사람들도 잠시나마 가벼운 마음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기쁨이 너무 커서 경기장을 나가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면 그 고통과 부담이 더 커졌겠지만...



 신임감독의 첫 경기부터 이긴 것이 아니고 세 게임의 실패를 거쳐서 완성한 첫 승이라서 더 의미가 있다. 실패의 과정에서 감독이 선수들 개개인을 정확히 지켜본 것 같다. 어디서 어떻게 쓰여야 그 사람의 장점이 극대화되는지를 알아챈 것 아닐까. 한 조직의 리더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가 바로 그것이다. 버릴 사람은 버려야 하고 쓸모없는 일을 하는 사람은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근무지를 조정해줘야 한다. 이 한 경기의 승리로 극찬을 하기는 좀 이른 것 같다. 하지만 이 여름을 작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낼 것 같다는 기대감은 버리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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