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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May 31. 2024

13. Re-Writing 나의 다시쓰기

   

  나의 <열하일기 75일 읽기>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1, 2권은 읽고 3권은 절반을 넘겼다. 칼같이 꼿꼿하게 날이 섰던 근육의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뭘 보고 아느냐 하면 열하일기의 수많은 다른 버전과 다른 번역판에 한눈을 팔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곁눈질로만 스치며 부러 눈길을 피하던 고미숙표 열하일기가 드디어 눈에 가득 차게 들어왔다. 이름하여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고미숙이란 나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다는 뜻이니 아마도 독서논술 공부할 때 접한 이름이었으리라.


   '고전평론가'라는 새로운 직업을 창출했다는 그 고미숙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열하일기』를 한문 원전으로 읽었을 거라고 넘겨짚었다. 그건 아무래도 섣부른 짐작이었던 것이 고미숙도 나처럼 한글 번역판만 읽었다고 한다. 그러고도 연암 사랑이 대단하여 자기만의 『열하일기』를 클래식 리라이팅(rewriting)시리즈의 001번으로 내놓았다. 리라이팅 곧 '다시쓰기'라는 것은 고전을, 21세기의 사람이 21세기의 코드로 읽어 21세기의 삶으로 새롭게 빚어내는 일이다. 2023년 12월에 출간 20주년 기념 개정판나온 걸 보면 20여 년동안 이 책은 성공리에 팔려나간 것이 틀림없다.(그동안 이 책도 안 읽고 나는 뭐했나 몰라.)


  예전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이 귀에 익었다. 옛 것을 미루어 새 것을 알라는 르침다. 수많은  고대 민요들을 수집하여 『시경』으로 엮어낸 공자는 오랜 전통의 가치를 이만큼이나 무겁게 여겼다. 요즈음에는 조금은 낯선, 법고창신(法古刱新)이란 말이 들린다. 온고지신과 법고창신 둘 다 꿋꿋이 옛 것에 바탕을 두라는 말이지만 '온고'(溫古)가 새로운 것을 앎(知新)에서 멈추는 소극적인 표현이라고 한다면 법고(法古)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刱新)것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한 걸음 더 적극적인 표현이라고 하겠다. 고미숙표 열하일기는 고미숙이 자기의 안경을 여럿에게 빌려주어 온고지신을 하게 만드는데 성공한, 고미숙표 법고창신인 셈이다.


  다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안 읽는다는 ‘고전’을 고집스레 ‘리라이팅’해낸 그린비는 어떤 출판사인가.  시리즈의 첫 이름인 리딩 클래식'을 밋밋하다며 '리라이팅 클래식'이라는 도발적인 이름으로 바꾸어 누군가는 읽도록 도발적인 시도를 한 출판사다. 일단 책 출판하여 먹고 살 자격이 있는 말쟁이인 셈이다. '리라이팅 클래식'은 고전을 소재로 삼았을 뿐 저자가 자기의 문체로 자유롭게 '리라이팅'(rewriting)을 하게 놔두는 게 특징이란다. 그 배려를 이용하여 고미숙은 특유의 톡톡 튀는 감각적인 문체로 잘 웃으며 농담과 장난을 좋아한  연암 박지원을 친근하게 되살려었다.


  책 앞표지에 제목 쓰기부터 색다르다. 원전의 제목을 그대로 쓰되, 저자의 제목을 부제로 달았다.『열하일기』의 제목을 쓰고 나란히 자신의 책 제목을 쓰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릴 일이다. 그런데, 저자 이름을 쓸 때에는 이 책의 저자를 앞에 두고, 원저자가 나중이다. 고미숙이, 천하의 박지원보다도 앞줄에 선다! 속 좁은 사람이라면 괘씸죄로 잡들이 호통부터 내지를 일이다. 그런데, 나도 내 글을 책으로 묶는다면 내 이름을 박지원보다 앞에 둘 수 있으려나? 이 발칙한 질문은, 그녀의 책을 먼저 읽다가는 말려들 것 같아 의도적으로 제쳐놨던 내 속내를 드러낸다. 역시나 괜한 우려가 아니었다. 고미숙표 열하일기를 읽고는 고미숙, 진짜 잘 썼다!, 고 슬그머니 주눅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만의 열하일기를 쓰고 있다. 내가 착안한 것은 고미숙도 미치지 못했을 부분이라고 감히 자부하면서 말이다. 만큼 이 18세기의 천재는 한번 빠져들면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넓고도 깊은 열하일기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 연암을 나는 김탁환의 소설 속에서 먼저 접했는데, 김탁환은 ‘18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두렵다’고 했고,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열하일기는 김탁환의 글에 녹아 스며들어 맛깔진  맛을 내고 아롱다롱 고운 무늬를 수놓고 있었다. 또한 고미숙표 열하열기는 김탁환하고는 또 다른 결을 가진  발랄하고 경쾌한 문체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그 고미숙표 열하일기에는 잊어먹을만 하면 한 번씩 들뢰즈/ 가타리의 노마디즘이 등장했다.  나알아먹는 척하며 꼭꼭 씹어 소화를 켜야 했다. 평소에 엄마의 역마살을 물려받아 유목민의 피가 섞였다고 자처하던 나다. 부모 덕에 남들보다 조금 더 이르게 많은 것을 접한 반면 부모 탓에 남들보다 조금 더 어리바리한 면이 많이 있는 나다. ‘너무 일찍 태어났나 봐’라고 생각될 때에는 엉거주춤하게 자리 매김을 하는 경계인을 자처하고 내 연륜을 다 담은 주름살을 볼 때는 그 주름살마다 철이 듬뿍 듬뿍 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다. 어디에나 뿌리를 진득하니 내리지 못하는 성정 탓에 생전 처음 봐도 이산가족 상봉하듯 깜짝 놀라워하며 수 있는 개념이 나한테는 노마디즘이었다.


  그런데,

노마드에게 있어 최고의 덕목은 우정이란다. 만났다가 헤어지는 젊은 중국 상인들은  ‘(연암)선생을 뵙고 마음껏 토론하니 이는 실로 하늘이 맺어준 연분‘이라고, 이틀 밤 만리장성을 쌓고 천생연분을 들먹이며 애틋한 멜로 드라마를 찍는다. 그 연암은 또 말을 탄 채로, 중국의 큰선비를 만나면 무슨 질문으로 애를 먹일까 라고 궁리를 하느라 글자 아닌 글을 쓰고 소리 없는 글을 읽으며 하루에 몇 권의 책을 꾸민다. 그러면서 친구를 사귀고 친구의 친구까지 찾아다니며 통성명을 하고 안부를 전하여 챙기는 연암을 보노라니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연암, 엄청나게 E네, 나는 I인데......


   단체 사진 한번 찍으려면 앵글 밖에 있는 나를 찾으러 다녀야 하는 민폐 동행이기 때문에 나는 노마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별별 사람을 다 만나고 못 본 것들을 죄다 눈에 담고 열린 마음과 호기심과 유머 감각을 대동한 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니며 단순한 편력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랑도 아니고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교감하지만 결코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노마드야? 그러면 나는 노마드가 아닌갑서. 아니 최소한 연암 스타일의 노마드는 아닌갑서. 그동안 혼자만 노마드인 체 하는 얼치기노마드였던갑서. 나, 유목민 아니고 정착민이었던 거야? 오늘 열하일기를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나는 나를 찾 숨바꼭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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