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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Jun 07. 2024

14. 열하일기 버전의 돈, 돈, 돈

  창대와 장복이가 주머니를 턴다. 동전이 26 있다.  국경에 서서 조선의 돈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갈 수는 없고 길에 버리자니 아깝다. 미성년자인 자신들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사와 술 좋아하는 연암이나 반색하게 해줬다. 청심환 한 알을 소주와 바꾸어 실컷 마시기도 했던 연암이다. 얼씨구나 하고 거하게 한 잔을 마신다. 그러고도 두 번째 잔의 술을, 여행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붓고 세 번째와 네 번째 잔을, 자신의 말과 두 하인이 무탈하기를 위해 붓는다. '고수레'다. 아랫것은 사람도 아니던 시대에 아랫것을 위해 고수레를 챙기는 연암은 그나마 마음이 따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 연암이 중국 술집에서 깜짝 놀란다. ‘두 분에게 합쳐 넉 냥을 드릴까, 각기 넉 냥을 드릴까?’ 라고 주인이 묻고 동행은 각각 넉 냥씩을 주문한다. 아니, 술 넉 냥을 누가 다 마신다고? 알고 보니 중국 술집의 넉 냥은 술값이 아닌 술의 무게다. 넉 냥을 주문하면 넉 냥들이 술잔에 술을 따라준다. 주문 방법을 제대로 익힌 연암은 혼자 술집에 간다. 넉 냥을 주문하여 단숨에 들이키고 8을 계산하고 다른 이가 쏜 술 석 잔까지 원샷한다. (투전판에서 딴 100여 푼도 술을 마시는데, 노름 동무들과 더불어 여럿이 실컷 마실 수 있었다) 남의 나라에서 혼자 술집에 간 것까지는 괜찮았으나 하필이면 험상궂은 덩치들이 버티고 있어 속으로 떨었던 호기심 천국의 연암이었다.      


  길거리 자판기 커피 빼먹듯 양매차 반 사발을 마시면 6이다. 국수 1사발과 소주 1잔, 삶은 계란 3개와 오이 1개가 모두 26(=42)이다. 일인분 한 끼지만 배가 불러 힘들 정도로 푸짐했다. 젊은 중국 상인들과 밤샘 대화를 나눌 때는, 떡 2쟁반과 양 내장탕 1동이, 삶은 거위 1쟁반과 찐 닭 3마리, 찐 돼지 1마리와 과일 2쟁반, 임안주 3병과 계주주 2병, 잉어 1마리와 밥 2솥, 나물 요리 2쟁반까지 은자 12어치다. 느닷없는 손님을 위해 주인이 부랴부랴 내놨는데, 연암이 이 음식들의 이름과 가격을 어떻게 죄다 알고 기억하여 썼는지 궁금하다. 음식마다 일일이 이름이며 가격을 캐물어야 했으리라. 못 말리게 넓은 오지랖의 이 천재는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자기는 그저 호기심이 많을 뿐이라고 짐짓 시치미를 뗐을지도 모른다.      


  연암은 바가지를 쓰기도 한다. 조선사신단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통사정을 하는 늙은이에게 보이스피싱 을 당한 것이다. 얼떨결에 참외 9를 샀는데 늙은이는 기어이 90푼을 내놓으라고 한다. 장복이가 50을 내놓고 창대의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보여줘 71으로 낙착이 된다. 낯선 나라에서는 어리바리해지기가 쉽지만 상대가 늙은이라 마음이 더 약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양반인지라 물건 흥정에 좀 서툴렀겠는가. 겨자가 아닌 황금 참외를 울며 먹어야 했으리라. 중국의 고위 공직자들이 시장에서 직접 물건을 고르고 가격을 흥정하는 걸 보고 한 수 배운 연암은 북경의 과일가게에서 62(=100//16닢=10푼)으로 배 2개를 사기도 했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 뱃삯이 1 163(=3)이다. 강 건너기 길잡이에 310(=500)이 들었다. 식자재 일일(一日)분을 환전하여  조달한 돈 1364(=2200=2)으로 북경 시내 관광용 (노새가 끄는) 태평차를 렌트한다. 발을 다친 창대를 위해 나귀 한 마리를 렌트하느라 124(=200)청심환 다섯 을 쓴다. 반면에 건드리기만 해도 툭 깨질 것 같은 장난감을 제작하는 데만 고급 은자 몇 냥 이상이다. 그림 하나를 사려고 해도 문은 267(=3 5)짜리에, 표구까지 더하면 7 을 더 받는단다. 의학서인 『동의보감』은 문은(말발굽 모양의 색깔이 아름다운 은화) 5 이 없어 사지 못하고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다.      


  돈 이야기만 풀어놔도 스멀스멀 선진국 냄새가 난다. 청나라에서는 먹거리는 비교적 저렴한 반면에, 학문과 예술, 문화 분야의 비용이 무시무시하게 증가하는 모양새다. 반선의 선물을 가지고도 사신들은 역관들에게 떠넘기고 역관들도 껄쩍지근하여 돈으로 바꾸는데 그게 은자 90이다. 90냥으로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청나라와의 선린(?) 외교에 일조도 할 겸 열하 관광 가이드에 앞장선 중국인 선비들에게 몽땅 줬었더라면 좋았겠다. 그네들의 수고에 비해 조선 사신단의 인사가 너무 야박하다고 연암 혼자 열없어 했다. 내 경험으로도, 연암처럼 열린 사고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전례 없이 뭔 일을 불쑥 저지르기가 참 힘들더라.      


  21세기에 살지만 우리는 확실히 조선 사람의 후손이다. 외교만큼은 선진국이라고 자부할 자신이 없다. 조선 사신은 당상관이면 3천 냥, 당하관이면 2천 냥까지 지니고 무역활동을 하여 이문을 남겨야 한다. 책문에서부터 중국의 수레를 렌트하니 여행 운송비가 급증하는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달려야 하는 약소국의 설움이다. 하지만 중국인 통역에게 주는 경비 700은 아무리 생각해도 약이 오른다. 중국인 통역은 조선어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자주 웃는 것만큼 자주 탄식을 내뿜는데, 돈만 챙기는 중국인 통역의 안하무인한 언행을 보고도 탄식한다. 이런 조선 외교의 문제점들을 연암은『허생전』에서 고스란히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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