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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Jun 21. 2024

16. 절, 했을까 안 했을까?

-예의를 아는 나라의 예의를 모르는 사신 노릇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군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집사가 있다. 공직자란 지역 행사에 참석하여 덕담도 해주고 격려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 한 번은 00교-정통 기독교에서는 이단이라고 부르는-의 행사에 가게 되었다. 자, 덕담과 격려의 수위를 어느 정도로 잡아야 신앙 양심에도 거리끼지 않고 공직자로서의 중립성도 훼손하지 않을까? 기독교인이라고 불교 행사에 안 갈 수도 없는 법, 사찰 행사에서는 어느 선까지 지켜주는 예의를 갖춰야 상대방의 반감을 사지 않고 무난하게 처신할 수 있을까? 모 교회의 저명한 장로 작곡가는 무심코 의뢰를 받아 찬불가를 작곡했다. 그런데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되자 일이 이 지경까지 될 줄은 몰랐던지라 심각하게 오랫동안 회개를 해야만 했다.


  1780년 8월 11일에 조선 사신단이 부딪친 일이 바로 이런 일이다. 찰십륜포의 반선을 만나라는 황명이 내린다. ‘서번의 성승(聖僧)을 만나보겠느냐?’ 거절해 봤자 ‘즉시 만나라’는 황명만 거듭 받는다. 말 안 듣고 애먹이던 조선이 어쩌자고 유례없이 칠 축하 사신단을 보냈네. ‘그 나라는 예의를 아는구먼’ 흐뭇하여 조선 사신단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이고 어디까지나 호의적으로, 반선과의 만남 주선한 황제다. 문제는 오랑캐 땅에 태어난 주제에 소중화(小中華)를 자부하는 철두철미한 유교국 조선이다. 만주족 오랑캐이지만 그래도 황제인 건륭제에게는 조선 인조 임금부터 고두례를 올렸으니 조선의 신하된 자가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반선에게까지 그래야만 해?  


  사신단은 못하겠다고 반발하고 반선을 만나서는 고두례를 하라는 눈짓을 못 본체하고 그냥 앉아버린다. 이미 앉았으니 어쩔 것이냐. 하지만 청나라 관리들은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문에라도 ‘조선국 사신들이 땅에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사례를 했으며, 반선이 사신들에게 내린 구리 불상 등 물품 목록을 문자로 바쳐 올렸다’고 쓴다. 조선사신단에 관련하여 이미 감봉처분을 받은 적 있는 예부 관리들은 황제의 처벌을 거듭 받지 않기 위해 거짓 보고를 올렸으조선 사신들이 고두례를 한 건 아니라는 게 연암의 입장이다. 다만 멀리에서 망견(望見)하여 제대로 봤을 리가 없는 연암이 전해 들은 것을, 무심코 읽으면 직접 현장의 목격담처럼 적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나처럼 다 어리숙하지는 않았던지, 고두례 여부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 없지 않다. 여러 사람이 역사 기록을 참조하여 연암이  본 것과는 다른 이미지의 반선을 찾아내었다. 반선은 건륭제의 거듭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추위와 질병 등 온갖 고생 끝에 열하에 온 존재감이 강렬한 존재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있어 반선의 단점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다. ‘두 명의 대신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사신들을 이끌고 반선께 배례를 올렸고 반선은 사신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만약 청나라 대신들이 강제로 조선 사신들에게 무릎 꿇고 절하게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도저히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기록도 나왔으니 검색을 하던 나는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말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러면 그렇지, 하얀 거짓말 내지는 얼렁뚱땅 초점을 흐리는 언사로 연막을 피운 들 신상을 탈탈 터는 이 21세기에 못 알아내겠나. 사신단의 정사인 삼종형 박명원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그럴법한 추측까지 곁들여 있다. 조선은 강대국 청나라조차도 오랑캐 만주족이라 노린내가 난다고 얕잡아보는 나라였다. 만주족도 못 되는 ‘오랑캐 중’ 반선이야 말할 것도 없이 만나지 않아야 한다. 더욱이 그 반선에게 절을 올려? 세상에 이런 일이! 자식의 혼삿길이 막히는 일이다. 귀국하자마자 그동안의 고생은 아랑곳 없이 부처를 받들었다[奉佛之事]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한다. 천하의 율곡도 일 년 간 금강산에서 중 노릇한 전력이 죽은 후까지 두고두고 있지도 않은 발목을 잡았었다. 절을 했든지 안 했든지 최대한 없던 일로 할 일이라.       


  반선에게서 선물로 받은 구리불상은 또 어떻게 하느냐? 천자의 스승이 준 물건을 안 받으면 불공하다고 할 것이요 받자니 명분이 없다. 숙소가 공자를 모시는 태학관인데 어찌 불상 따위를 가져가느냐. 절에 버리자니 청나라가 분노할 것이요, 귀국할 때 가져가면 말썽거리가 될 것이다. 궤짝에 넣어 압록강물에 띄워 버릴까. 진짜 금부처라면 몰라도 도금 부처는 버려도 된다고 웃었지만, 차마 못 버렸나 보다. 보고 차원에서 가져왔더라도 아니나 다를까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 소동을 벌였다. ‘사악하고 더러운 물건[邪穢之物]’을 가져와 국가에 치욕을 끼치고 장차 후세의 비웃음을 받을 짓을 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가 불상을 어떻게 처분했느냐고 묻자, 박명원은 "평안북도 영변의 모 절에 봉안했다"라고 대답한다. 중국에는 길 떠나는 이에게 불상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니, 이 불상이 반선의 구리불상인지도 모른다. 연암은 귀국하여 열하일기를 쓰는데 삼 년 걸렸다. 이때쯤이면 권당 소동도 가라앉았을 터이지만 그래도 자칫 붓을 잘못 놀렸다가는 가라앉은 불씨를 뒤집는 사단이 날 것이다. 해외(?) 여행까지 데려가준 삼종형이 봉변을 당하도록 글을 쓸 수는 없지 않나, 여기 있도 없는 반선은 좀 나쁘게 써주고, 고두례는 없던 일로 만드는 게 무난할 법도 하다.      


  멋모르는 청나라 황제는 ‘그 나라(조선)는 예의를 알건만 사신은 모르네 그려’ 했다는데, 예의를 아는 나라의 사신이 예의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예의를 아는 나라의 예의 모르는 신하 노릇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위태로웠을 뿐이다. 불교신문에는 연암도 불교를 폄훼하는 점에서는 당대 사대부들과 똑같더라는 기사가 나온다. 불교를 절대로 옹호할 수 없던 시대에 불교도도 아닌 연암이 과연 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슬그머니 연암의 편을 들고 싶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요즘도 신앙과 신념에 따라 당당하게 말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저러나 문제의 이 불상아 발견된다면 국보급이다. 북한만 아니라면 당장 쫓아가 진위를 확인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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