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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Jun 28. 2024

17. 말로는 깎아내리며 공들여 써낸


  '서번의 성승을 만나라'는 명령이 내렸다. 거절해 놓고도 꺼림칙하다. 잠시 후 구두 명령이 또 내렸다. 재촉을 무릅쓰고 어슬렁거리다가 날이 기운다. 결국 길을 반쯤 가다가 '다음에 오라'는 조칙을 만난다. 저녁에 ‘내일 식후나 모레 조치가 있을 터'라는 전갈이 온다. 하게 고 당기다가 군기대신이 아예 조선 사신단을 등떠밀어 서번의 성승인 반선에게 안내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사신단은 절을 하라면 어정쩡하니 하는 체 하고, 차를 몇 차례 거듭 마시라면 마시고, 오중 통역을 거쳐 질문을 받으면 대 했다. 황제의 명령을 어기지 못해 반갑지 않은 물을 만나려니, 하인들부터 으로 반선의 목을 베고 황제를 비방다. 오랑캐가 하는 짓이 이렇지, 명나라 때에야 이런 일이 있었을라구, 투덜투덜. 어린애처럼 시키는대로 엉거주춤 하는 사신단의 마음이 힘들었다.


  숙소에 돌아오니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중국 사대부들이 엄청나게 부러워한다. 황족이나 부마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반선을 너네가 만나다니! 반선이 어떻게 생겼더냐고 물으며 믿거나 말거나 반선의 도술이 얼마나 신통한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미를 한다. 그런데 또 다른 반전이 있다. 아무래도 반선은 호불호가 심한 듯 연경에 와서는 반응이 신통치 않다. 반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기꺼이 하지 않으려고 하며 술자리에서 누가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하자마자 사정없이 눈치를 준다. 알고 보니 얼마 전에 한 선비가 반선의 일을 극렬하게 논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황제가 격노하여 엄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 선비가 연과법(내장을 도려내고 목을 자르는 형벌)으로 처형당하는 광경을 조선사람들도  적이 있다. 연암은 감히  묻지 못했다.


  그러나 연암이 누구인가. 술자리에서 은밀하게 정보를 캐낸다. 이것저것 들은 바에 의하면 한 서번 여자가 건져낸, 물에 뜬 헝겊이 향내나는 덩어리가 되고 이것을 먹어 낳은 아기가 팔사파요, 팔사파는 원나라 쿠빌라이에게서 <대보법왕> 호칭을 받은 이래 명나라에서도 국사(國師)로 불리며 천자에게서 인장을  받고 활불로 일컬음을 받았단다. 청나라도 그 전례를 이어받아 서번 일대를 평정하고 라마교를 진흥시키며 반선을 예우해왔다. 반선(판첸라마)라마교의 이인자로 곧 일인자(달라이라마)가 될 신분이다. 마흔두 번이나 세상에 태어났다는 현재의 반선은 마흔세 살이란다. 지난 5월에 육(六)황자 서까지 가서  모셔황금 전각을 지어 드리고 스승으로 섬기고 있단다.      


  아무리 황금전각을 어마어마하게 지어드린들 그 궁전이 누추할 정도로 서번에서는 황금 기와와 백옥 계단의 궁전에 거처하던 반선이다. 청 황제가 반선을 잘 모시는 수준이, 몽고가 황제에게 바친 반양을 다시 반선에게 공양하는 정도다. 반선은 명나라 시절부터 극진히 대접해드리던 것이 청나라에서도 황제와 손을 맞잡고 무릎을 맞대어 함께 앉아 기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러니 관리들이 다투어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여 자기네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기를 바란다.  원나라 시절에는 반선에게 황천지하 일인지상 선문대성 지덕진지라는 호까지 내렸다는데, 일인지상의 일인이 천자가 아니라 반선이라구? 선문대성 지덕진지 즉 문화를 편 성인이자 덕과 지혜가 있는 인물이 공자이지 반선이야? 참 비루연암은 쓰고 있다.


    역대 황제들과 당대의 건륭제가 과연 그 비루함을 몰랐을까? 조선의 백수 연암의 눈에도 보인 것을  닳고 닳은 정치구단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는’ 자들이 뭐 하러 오랜 세월 그 행태를 반복해왔겠는가? 연암은 반선에게 (말로만) 거창한 칭호를 부여해준 것은 공자를 추하게 억누르는 짓이라고 비야냥거리며 태어난 사람 중에 공자보다 더 나은 이가 없다고 단언한다. (20세기에, 연암의 이 말은 틀린 말로 판명되었다. 한국에 관광하러 온 공자의 후손이 성균관 제사에 초청을 받았는데, 정중하게 거절했단다.  공산주의자인 그에게는 조상인 공자보다 공자묘를 훼손한 공산당이 더 나은 이였던 것이다.) 생각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연암이 조선과는 별 상관이 없는 반선에 관해 이렇게도 많은 지면을 할애한 의도가 무엇일까? 반선이 받은 예우로부터 서번(티벳)부족들의 세력을 분산시키려는 황제들의 속셈을 읽어낸 것이다.


  중국 사대부들이 반선의 생김새를 물은 것은 정작 자신들의 눈과 귀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조선 사대부는 평다. 하지만 외교관이라면 적어도 한번은 반선을 만났어야 한다. 서번 세력의 대표인 반선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요즘도 걸핏하면 뉴스에 뜨는 반선의 행보를 예전 황제들이 봤다면 ‘어쩌자구 걔들을 그렇게 다루느냐’고 혀를 찼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힘으로만 억눌러선 안 될 일이 바로 반선이라는 존재다. 반선에게 함부로 대접받고 업신여김을 당했어도 거리낌이 없었다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조선 사대부는 여전히 완강한 자세를 취한다. 적어도, 황제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반선에게 죽어도 절하지 않은(혹은 안 했다고 주장하는) 조선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그런데 연암은 말로는 반선을 여지없이 깎아내리며 아주 공들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까지 써냈다. 조선시대의 유일한 라마교 관련 기록을 남긴, 표면과 이면이 다른 연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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