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연경은 저절로 사치스러워진 도시입니다. 사찰과 궁관, 화려함을 다투는 부자의 묘당으로 꽉 찼습니다. 아무리 기를 써서 돌아다녀도 백 분의 일이나 봤을까, 연암은 ‘문틈을 지나는 말이나 여울에 달리는 배처럼 관광을 했습니다.’ 그 결과 ‘피로하고 맥이 풀려 꿈에 부적을 보듯 신기루를 보듯 거꾸로 기억하거나 명승고적을 잘못 알았습니다. 돌아와 보니, 종이는 나비의 날개폭이요, 글자는 파리 대가리이니, 후다닥 베낀 탓입니다. 이거나마 엮어 <앙엽기〉라 이름합니다.’ 옛사람이 감 잎사귀에 글씨를 써서 항아리에 넣었다가 모아 기록한 일을 본받은 것이지요.
종이가 부족했던 시절의 일입니다. 연암만큼이나 가난했던 중국의 한 선비가 떠오르는 생각들을 감잎에 적었답니다. 감잎은 잔털이 없고 매끄러워 먹물을 잘 먹어요. 선비는 감나무 근처에 항상 붓과 벼루를 놔두고 선비의 아내는 겨울에 쓸 감잎을 정성껏 챙겼습니다. 선비는 종이를 사면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어둔 글을 쓴 감잎을 꺼냅니다. 그 메모를 뼈대 삼아 살을 입혀 책으로 엮었답니다. 감잎에 글씨를 쓴 건 아니었겠지만 감잎에 글씨를 쓰는 심정으로 어렵사리 메모를 한 연암이 그 메모를 마중물로 삼아 이 어마어마한 벽돌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연암의 앙엽기에서 눈에 띈 것은 석조사였습니다. 명색이 절인데, 중이 없고 과거 수험생들이 살아요. 서른한 명이 책을 짓거나 판각을 새기며 지내는데 글 품팔이를 다니다 보니, 연암의 벗 유세기도 나가고 없습니다. 유세기는 올해 2월에 상처(喪妻)하고, 어린 딸을 처가에 맡기고 몸종만 데리고 과거시험을 보러 왔어요. 주인 없는 방만 정결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유세기는 남쪽 멀리바다만 건너면 대만(臺灣)인 복건에서부터 온 선비입니다. 먼 고향의 딸을 그리워하는 아비의 마음이 눈에 밟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연암은 안쓰런 마음에 발길을 못 돌리고 한참 서성거렸습니다.
명나라 시절에 대륭선호국사(寺)에는 열하의 반선(판첸라마)과 같은 서번의 법왕 영점반단과 저초장복이 거주했었습니다. 진각사(寺)에는 서번의 판적달이 바친 금부처 다섯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반선이 예우를 받은 건 청나라에서만 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굳이 황금기와 지붕의 찰십륜포를 짓는 수고를 무릅쓰면서까지 반선을 모셔야 했을까, 싶기는 하지만요. 절은 서번 승려의 거처이다가 황제의 사저(私邸)로도 사용된다고 하니, 왕이 없는 경복궁이 민간인의 공원이나 외국인의 관광지가 되는 격입니다. 종종 쓸모가 있으니 헛일은 아니었네요.
이색적인 이마두총(利瑪竇塚)도 있습니다. 돌기둥 위의 포도 시렁에 포도가 익어가며 돌 패루 세 칸에 돌 사자가 마주 앉아 있는, 서양 선교사 묘역입니다.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3리에 걸쳐 선교사 칠십여 명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연암은 야소회 선교사 이마두와 탕약망의 기념비를 언급합니다. 예수회 선교사인 탕약망(1591~1666)은 볼모로 와있던 조선의 소현세자와도 교유를 한 인물입니다. 이마두와 탕약망의 흔적만으로도 연암이 얼마나 설레었을지 상상이 됩니다.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배우고 싶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아무도 못 만났습니다.
메모 쪽지들을 방 하나 가득 늘어놓고 날짜별로 정리하는 연암을 그리며 나도 나의 종이들을 만지작거립니다. 나도 내 글을 지성스레 고쳐 써서 백 쪽이 넘는 책 하나를 엮을 계획이거든요. 2025년에 뭐 했냐고 묻는다면 연암을 읽었노라고 말하겠어요. 이 말로 부족하다면 연암을 썼노라고 대답하겠어요. 그래도 미심쩍다면 2025년을 연암으로 시작하여 연암으로 끝냈다고 선언하겠어요. 열하 글들을 수정하고 교정하여 구슬처럼 한 줄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 생각입니다. 다 스러진 열정에 불쏘시개를 던지며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뭔 소용도 딱히 없는, 글쓰기와 함께 나의 2025년이 더욱 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