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9) 뽕나무 아래 사흘을 묵으면

by 정영의

‘뽕나무 아래에 사흘 밤을 묵어도 추억에 남는다’고요? 불교에서 나온 말이군요. 승려는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 밤을 계속 묵지 않아야 하는데, 구름처럼 바람처럼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야 할 마음에 애착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처 없이 걸식하며 밤에는 나무 아래에서 지내는데도 사흘이 지나면 장소를 옮긴다는 것이지요. 아무 것도 아닌 그냥 나무 하나뿐인 곳에서도 마음이 뿌리를 내리는 거죠, 추억이라는 이름의.

하물며 공자를 모신 태학에서 그 두 배나 되는 여섯 밤을 지냈어요. 고운 님 하나 없이도 밤을 새워 붓으로 만리장성을 수없이 쌓고 허문 벗들과 함께 외로운 줄을 몰랐었고요. 지금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다시 돌아올 일 없을 길을 떠나는 마음은 헛헛합니다. 마지못해 불경을 인용하는데, 누군가가 '너 들켰어, 딱 잡았어' 하고 이 선비의 수신(修身)의 부족을 웃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이미 마음 한켠을 싸늘한 바람이 할퀴어 지나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가에서 헤어지는 이별이 슬픈 법이라고 그대는 말했지요. 이국(異國)으로 떠나는 이별이야말로 어느 곳, 어느 때에든지 슬프다고도 했지요. 정말로 그런가요? 아니에요, 이제는 그대도 알고 있지요, 그대가 틀렸다는 걸. 그대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신선하고 화려한 태학과의 이별을 겪기 이전이었기 때문이에요. 호곡장에서는 한바탕 울만 했었어요. 호북구에서는 그 위용에 압도되어 울음조차 안 나왔지요. 여기 태학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넘쳐 흐르네요. 이곳 열하에나 만난 벗, 기풍액도 울고 있어요. 이별은 그 어떤 상남자라도 울리고 맙니다.

그대는 또 다른 열하의 벗에게서 구리난초 화분 하나를 빌려다 놓고 자기만의 퀘렌시아, 자기만의 아늑한 거처로 삼았어요. 그곳을 동란재라 명명하고 일필휘지하여 이름을 써붙였겠지요. 그곳에서 사람 좋아하는 그대는 객을 초청하여 날밤 새우며 토크쇼(?)를 했어요. 조선에서는 공자를 자주 모실 수 없었어요. 조선의 법으로는 과거에 급제해야 진사가 되고 진사가 되어야 성균관에서 공부할 수 있었으니, 그대는 많은 날을 성균관에서 보내지는 못했지요. 하지만 열하의 대성전에서 공자에게 배례하니 선비로서는 꿈 같은 나날이었지요. 그렇게 성인과 범인(凡人), 성승(聖僧)과 황제, 선현과 벗을 논하고 당대의 세계정세를 예측하며,

동란재에서 노닐던 날은 두고두고 반추할 이 세상 소풍이 되었습니다. 신라인과 고려인이 온 적이 없이 조선인인 그대가 밟은 새북 땅에 천백 년 후에야 몇 사람이나 올지 모른다고 그대는 말

전망했어요. 연암이여, 그대의 예상은 틀렸어요. 불과 삼백 년만에 조선은 남의 손에 넘어가고 그 자리에 생겨난 대한민국은 눈부시게 성장하여 오늘날 몇천, 몇만 명이 그곳을 밟았답니다. 225년이 지난 지금 놀랍게도 그대의 열하 족적을 따라 밟는 풍습까지 생겼으니 믿어지나요?

『열하일기』는 그대의 생전에는 출판도 안 되고 필사되어 읽힌 찐 베스트셀러였으며 그대의 손자까지도 불태우려고 마음먹던 금서(禁書)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대를 사모하는 후손들이 따라 밟는 ‘연암 투어’의 안내서가 되었답니다. 그대를 배척하고 비판하며 입을 다물게 하려던 자들의 후손조차도 그대의 족적에 제 족적을 보탠답니다. 황제에게는 이틀거리요, 그대에게는 무박 나흘 장거리였던 열하 노정이 이제는 고작 여섯 시간짜리 비행기 여행이 되었어요.

여행이란 느리게 갈수록 더 많은 것을, 빠르게 갈수록 더 적은 것을 보는 법입니다. 더 느린 만큼 풍성했던 그대의 여행에 비해 더 빠른 우리의 여행은 훨씬 더 빈약할 터입니다. 하지만 난쟁이인 우리라 할지라도 우리의 시야는 그대보다 더 큽니다. 그대, 연암이라는 거인의 어깨를 딛고 서서 그대보다도 더 멀리 더 넓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우리는 그대의 수레자국과 말발굽 자국에다가 우리의 자국을 유전자처럼 보태어 새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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