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 해외여행을 가면 불편한 것 중의 하나가 팁입니다. 가격표에 딱 맞게 계산하는 한국형 버르장머리를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행 경비에 가이드 피(fee)는 별도입니다. 그리고 해외물 좀 더 먹은 선배들이 조곤조곤 일러주는 건 숙소 침대의 베개에다가 1달러 지폐를 놔두는 게 팁이랍니다. 주변에 해외여행 바람이 불어 덩달아 설레는 와중에 나는 애먼 데에 신경이 쓰입니다. 코로나 바람에 물가가 다 올랐대. 그러면 1달라는 안 되고 2달라는 놔야 하나? 환전할 때 소액권을 얼마나 챙겨야 할까? 등등 김치국부터 먼저 마시기입니다.
오후에 연암은 공자를 배알합니다. 사신 세 명과 함께 열하 태학을 방문한 겁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유학자는 공자에게 향을 피워 올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보니까 주자를 공자의 제자 십철(十哲)의 아랫자리에 모셨네요. 붉은 바탕에 한자와 만주글자를 썼는데 금글씨로요. 황제들의 글들이 행여 빠질세라 보이는데, 뜰에는 향정이, 위패마다 향로가, 위패 앞마다 휘장으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모셨습니다. 삼사는 경건한 걸음걸이로 숙소로 돌아옵니다. 각기 청심환 몇 알과 부채 몇 자루씩을 추사시와 왕민호에게 보냈습니다. 태학을 안내해 준 보답입니다.
그것이 하루 품치고는 참 약소한 선물이라고 연암은 생각합니다. 저절로 숭정 갑술년(1634) 6월 20일의 일이 떠오릅니다.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노유령이 24일에 성균관을 참배하고 함께 했던 조선 유생들에게, 은 오십 냥을 내놨습니다. 사양은 못했지만, 조선 유생들은 그 은을 일종의 모욕으로 간주합니다. 당시의 화폐가치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국의 사신인만큼 통크게 쏜 것일 터입니다. 그런데 일개 공직자인 노유령이 뭔 돈이 있다고 모욕으로 여길 만큼 인심을 후하게 썼을까요?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소현세자가 책봉될 무렵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서 은 13만 냥을 긁어갔답니다. 인조실록에는 ‘노유령이 선물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 국가의 체모를 크게 손상하였다. 엄중하게 다스려야 마땅하나 먼 길의 노고를 생각하여 봐주고, 그 은을 창고에 보관했다가 되돌려 보내겠다’는 명나라 측의 입장이 실렸습니다. 17C에 환관 출신 사신들이 은을 긁어모으러 조선에 왔답니다. 그러니 선뜻 은 오십 냥을 내놓은 노유령이 긁어가기는 또 얼마나 긁어갔을까요! 오죽하면 국가 위신을 손상시킨 죄로 탄핵의 대상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조선에 대해 명은 가혹했는데 청은 관대했다는 말이 18C쯤에는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연암이, 두 거인(擧人)에게, 변변치 못하게 대우한 것에는 부끄럽게 여깁니다. 몸소 그들의 숙소를 찾아, “창졸간에 나선 나그네라, 지닌 것이 없어 변변하지 못한 환약과 부채를 올리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하고 사과를 덧붙이거든요. 살림살이도 녹록치 않은 지방 출신 거인인줄 아는 데다가 며칠 동안 돈독히 쌓아 올린 우정 한 스푼을 얹어 넉넉하게 사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두 거인은 허리를 굽히고 사례를 합니다. “주인된 도리로 인도한 것이 무슨 수고이겠습니까. 분에 넘치는 선물을 주시니 충심으로 감사하옵니다.”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이 수험생 투어 가이드들은 연암 일행을 위해 기꺼이 하루를 내주었습니다. 청심환과 부채는 그냥 분에 넘치는 선물로 여기고요. 돈 받자고 한 일이 아닙니다. 우정으로 했던 일에 가격을 매길 수는 없지요. 왕곡정이 청심환 한 알을 요청하는 편지와 은자 두 냥을 보내었어요. 연암은 진짜 청심환 두 알을 보내며 돈은 되돌려 보냅니다. 어때요? 이만하면 가이드 피(fee)는 충분할까요? 물가가 당최 알쏭달쏭하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