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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Mar 08. 2024

1. <열하일기 75일 읽기>를 시작하다

-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열하일기를 읽기 시작한 첫날이다. 두 개나 있는 역자 서문부터 읽는다. 2009년에 나온 초판 서문과 2017년에 나온 개정판 서문이 그것이다. 8년에 걸쳐 아홉쇄가 나왔으니 일 년에 한 번은 한 쇄를 펴냈다. 남들이 이렇게 꾸준히 열하일기를 읽는 동안 나는 안 읽고 있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비문학은 별로다. 국사 특히 조선 역사는 공부하면 할수록 울화통이 터지던 기억도 뚜렷하여 조선 이야기는 소설로나 재미있다. 이토록 심한 편독(偏讀)자인 내가 큰 맘먹고 비문학을 읽으려면 필이 확 꽂혀야 한다. 열하일기에 필이 꽂히게 만든 그 길라잡이 역시 소설이었다. 소설가 김탁환의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 연암이 자꾸 나오는 것이다.      

  여기도 연암, 저기도 연암이네, 하는데 그 연암이 볼매(볼수록 매력있는 인물)로 나온다. 우연찮게도 <열하일기 75일 읽기>라는 기상천외한 이름의 강의를 발견했다. 천천히 읽기라면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다. 즉시 강의를 신청하고 책도 빌려와 시작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웬걸, 아무 일도 없이 다음 날까지도 연락이 없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적이 없어, 혹시나 하고 전화를 했더니 역시나 폐강됐다는 것이다. 다른 신청자가 없단다. 허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이왕지사 빼든 칼로 무라도 자르겠다고 결심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으니. 혼자 읽자!      

  

  그렇게 서문부터 읽었다. 읽다가 옛말 하나를 마주쳤다. ‘살강 밑에서 숟가락 줍기’라는 말이다. 살강은 시골집 부엌에 그릇을 얹어놓기 위해 벽 중턱에 드린 선반이다. 그 살강 밑에 숟가락 몇 개쯤은 항상 떨어져 있음 직하니, 그 숟가락을 줍고 대단한 일을 해낸 양 뽐낼 일은 아니다. 친정아버지가 이 말을 하시던 기억이 났다. 어릴 때는 맥락을 살피건대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말씀이었다. 내 기억의 뻘밭에 깊숙이 묻혀있던 어휘를 피상적인 독서에 빗대어 연암이 실제로 사용했다는 것에, 책을 읽기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호감도가 상승하고 있었다.     


  피상적이지 않은 독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문답하는 동시에 그 문답의 밖에서 실정을 얻어야 한다. 행만 읽지 말고 행과 행 사이를 읽으라는, 요즘 말로 행간읽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량이나 시간의 제도가 어떠하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관리의 등급이 이렇구나 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시와 음악을 감상하는 듯 하며, 시장의 물가가 싸고 비쌈을 어림하여 맞추는 식이다. 중국말을 모르는 연암은 중국 사람들과 필담으로 소통을 했으니, 지묵(紙墨)의 밖에서 그림자와 메아리를 얻는다는 표현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그대로다.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해외여행에 나선 풋내기 대학생보다는 철이 듬뿍 든 마혼셋의 나이에 얼마나 선행학습을 단단히 한 후에 연행록을 쓰기로 큰 맘 먹고 여행에 나섰는지를 보여준다.      


  서문에서 역자 김혈조는 열하일기에서 주목할 것 몇 가지를 제시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선비 곧 지식인의 역할에 관한 제언이 마음에 와 닿았다. 연암에 의하면 선비란 독서하는 사람이고 선비의 사회적 역할은 독서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조선의 지독한 가난은 따지고 보면 선비가 제 역할을 못한 데에 있다’ 당시에는 불온하게 여겨진 나머지 문체 반정이라는 봉변을 당했던 문제적 연암체로 이렇게 말한다. 역자는 열하일기의 진정한 주제는, ‘있었던 세계와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과 통찰을 통해 있어야 할 세계를 전망하고 모색한 것’이라고 한다. 자, 이제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이 전망과 모색을 따라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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