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은 이미 지나갔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

by 소설

낮은 나른하고 바람은 아직 쌀쌀하다.

봄이 오기 전의 느슨한 오후다.

집중하기 어려운 날씨, 게으른 핑계가 슬금슬금 계획을 밀어낸다.

무기력한 기운을 이끌고 죄책감을 지우려는 듯 책을 꺼내든다.

무용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다.

클레어 키건의 짧은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

추운 겨울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에게만 어려운 시절이 있는 건 아니라는 위로처럼 느껴진다.

추위에 감각이 둔해지고 머릿속이 멍한 듯한 우울감을 표현하고 있어서 차분하지만 어둡고 무거운 기운이 내내 감돈다.

마지막을 다 읽고 나서 어느 부분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고 진한 감동을 느꼈을까, 의문이 들었다.

한번 더 되짚어 읽어보니, 카메라를 따라 움직이듯 단조롭게 묘사하는 일상과 의뭉스러운 사람들의 표현, 단호하게 결정하기 어려운 감정의 변화를 따라가고 있어 현실의 무게감이 더 실려있다.


<맡겨진 소녀 Foster>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키건이 인물에게 높이 평가하는 가치는 말없는 진중함이다.

펄롱은 무던하고 조용한 사람이다.

약간은 소심해 보이기도 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가족에게 세심하고 성실하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시기라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어드는 모습을 자연스레 보여준다.

초라한 과거에 머물지 않고 고운 딸들을 부양하는 데 집중하기로 결심하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한편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혹독한 추위에도 크리스마스의 여유를 챙길 수 있는 가족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바라볼 때 생기는 불편한 감정들이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일요일 아침 수녀원에서 세라의 불행을 보고 꽉 막힌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미사를 본 후, 바깥공기를 마시러 네드의 집을 들러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된 저녁을 보내고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한다.

주변 사람들과 그들의 조언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어',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다 한통속이야'하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펄롱의 마음속에는 미시즈 윌슨의 '사람한테서 최선을 끌어내려면 그 사람한테 잘해야 한다'는 말이 머무른다. 좋은 사람의 말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이발소에서 기다리며 '나는 왜 그들과 다른가' 그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흘러가는 감정이 나를 힘들게 할때가 많아 나도 이런 질문을 종종한다.

'나만 느끼는 생각이 달라서 이렇게 힘든 것일까'

흘러가는 생각이 마음대로 떠돌게 내버려 둘 때가 있다.

이걸 정리하기 위해 써야 한다고 깨달았지. 너무 힘드니까.


120 페이지 안에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이미지와 단상을 담고 있다. 묘사의 상징적인 의미를 고려해 보려고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문장문장이 새롭게 다가왔다. 심심한 유머도 꽤 있었다!

이래서 널리 이해되는 좋은 작품은 다르구나 싶다.

사실적 배경의 문제점과 인간의 이중적인 면을 다루고 있으니.

다시 읽었을 때 새로이 발견 할 수 있는 깊이를 담을 수 있는 상징과 은유, 군더더기 없는 표현으로 펄롱의 생각과 감정변화를 압축해 놓았다.

자기는 마냥 문간에서 기다려야 하는 신세인 건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면서 그 많은 시간을 이 집 저 집 문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보냈으니.
차가 수녀원에 가까워지면서 창문으로 비치는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펄롱은 마치 자지 자신을 만나러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표면에 불 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 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다리를 건너 검은 배로 강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이 아무렇게 돌아다니고 떠돌게 하는 장면에서 내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걸 느꼈다. 과거를 떠올리며 미시즈 윌슨이 보여준 친절과 사소한 말과 행동이 합해져 자신의 삶을 이루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행동함으로써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그 최악의 상황은 지나갔다.

앞으로 어렵겠지만 맞설 수 있으리라.

펄롱의 강인한 위엄이 드러나는 마지막 부분이 진한 감동을 불러왔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의 가슴속에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감각을 통해 옛 기억을 떠올리는 묘사가 여운에 남는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고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에서 레몬 냄새를 통해 옛날 부엌에서 부연 색깔의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크리스마스 무렵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실망했지만 크리스마스 캐럴 책 선물로 인한 자랑스러운 기억과 소중하고 따스한 순간을 떠올린다.

차를 끓이고 케이크를 먹는 여유를 가지고 사소한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오늘 오후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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