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동거의 시작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인연이 시작됐다

by kseniya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려고 하면 그 인연이 의도적이건 아니건 마치 예정된 것처럼 뭔가에 홀리듯 빨려 들어가게 마련이다. 비록 그 인연이 악연일지라도 말이다. 마리나와의 인연도 그렇게 내 앞에 인연으로 다가와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느낀 것은 작은 인연임에도 불구하고 실타래처럼 서로 엮인 수많은 인연들이 다 필요하지 않은 인연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인연은 또 다른 인연을 만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삶의 조각들은 작은 인연들이 모여서 인생의 하나의 커다란 그림이 되어주었다.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어린 마리나는 착하고 순진해 보였다. 적어도 처음 봤을 때는...

마리나의 러시아 친구이자 그녀에게 러시아 과외를 해 주던 이다는 우리 학교 출신 학생이었다. 그녀가 가르치는 한국 회사의 주재원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옆에 집이 나왔다고 알려 줬다.

(이 친구도 가까운 미래에 내 인생의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었으며, 한국에서 재연배우지만 TV Surprise에서 주연 배우로 활동 한 친구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10 분 거리에 위치한 이 아파트는 지금까지 경험한 다른 아파트와 달리, 최신 아파트 건물이어서 건물은 깨끗했지만, 무엇보다 아파트 내부 시설은 최신식이었다. 아파트는 마음에 들었지만 집세가 문제였다. 마리나와 둘이 분담을 하더라도 그다지 가격이 싸지는 않았다. 시골 쥐가 곧 서울 쥐가 되려는 찰나였다. 돈보다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오랜 고민 끝에 집을 계약했다.

그렇게 마리나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올야는 심기가 불편했다. 나에게 어느 정도 미안한 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밖으로만 돌았던 내가 짐을 챙기러 갔을 때 , 사샤로부터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들었을 것이므로, 나에 대한 걱정은 그다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짐을 싸면서 새 아파트 주소를 알려주고 원할 때마다 언제든 들르라고 했다. 아무래도 학교가 가까워서 불가피하게 그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그녀에게 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제 완전 자유다. 좋았던 기억도 있던 이 집을 나서면서 왠지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시 이 집을 방문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항상 삶은 처음과는 달리 또 처음 먹었던 마음가짐과는 달리 흘러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나는 올야의 품에서 떠났다. 처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올야의 집에서 낯선 이방인의 모습으로 들어온 그 날의 내가 더 이상 아니었다.

나는 좀 더 자신감이 생겼고, 나의 목표는 보이지 않게 서서히 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리나와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잘 따랐고 아무래도 내가 언니다 보니 음식은 내가 주로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나 가치관이 확립되기도 전에 ,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결코 좋을 수 없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러시아 공립 고등학교에서 마리나는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그녀의 졸업이 다가오자 마리나는 부모 없이 졸업식을 치러야 할 상황이 생겼다. 주위에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졸지에 룸메이트에서 이것저것 신경 써줘야 하는 그녀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이른 새벽이 되면 아파트 밖에서 들려오는 총성은 간담이 서늘하게 만드는 일상 중에 하나가 되었다.

마리나는 이 지역의 마피아들이 서로의 이권 다툼을 위해서 총격전을 벌이는 것이라고 했다. 한 두발도 아니고 여러 차례 총성이 울리면 마치 영화에나 나오는 것처럼 현실적이지가 않았다. 총성이 멈추면 그 날 새벽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을 거라 생각을 하니 참, 무섭다가도 허탈하다.

사회가 어지러울 때 가장 먼저 활개를 치는 악의 원천인 마피아 세력들은 나라나 인종에 상관없이 어쩜 그렇게 다들 하나같이 비슷한지 우습기까지 하다.

그들은 마치 뭐라도 된 양 짧게 깎은 깍두기 머리를 하고, 로고를 제외하고는 알아볼 수 없는 낡은 구식 벤츠를 몰며 불안을 조장하며 거리의 법칙을 무시하고 돌아다녔다.


한 번은 모스크바 마피아가 그 먼 곳에서 이 곳까지 원정을 와서 난동을 부리느라고 도시의 가장 중심거리인 학교 앞 도로가 완전히 차단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건으로 하바롭스크 마피아 두목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모를 만나러 공동묘지를 갈 때 그곳 입구에 가장 크고 화려한 묘지가 이 마피아 두목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었다.


이 외에도 그 당시 우리 집 근처에서 큰 살인 사건이 일어났었다. 미국 시민권자인 한 노부부가 몰래 탈북자들을 돕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어느 날 무장 한 갱스터에 의해 무참하게 아파트에서 살해당했다. 아마도 탈북자를 돕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북한의 소행인 것으로 드러났지만 어찌 됐든 그 사건은 피해자 부부들이 미국 시민권자라서 국가 간에도 아주 민감한 사건이었다. 그 일 이후 그곳으로 지나갈 경우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웠다. 러시아 사회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처에 숨어 있었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마리나는 같은 한국 친구인 순례를 만나러 가거나 남자 친구인 상원이를 만나러 가는 날, 새벽 2시가 돼서야 들어오는 경우가 잦았다. 도대체 그 위험한 곳을 어떻게 새벽에 다니는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대단들 하다.


마리나가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는 날은 신경이 많이 쓰였다. 일찍 자야 하는 나와는 달리 마리나는 야행성이었다. 그녀가 들어올 때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아파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아파트는 방이 하나뿐이라서 서로 공유하는 넓은 방에서 살았기 때문에 마리나의 일거수일투족 다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