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한 칸짜리 낯선 곳에서...

나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다

by kseniya

남편이 엘에이로 떠나고 난 후, 아들과 나는 이제 이 좁은 한 평짜리 방한칸의 공간에서 생활을 해야 한다.

그들의 스케줄에 맞춰 밥을 먹어야 하고,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이상하다

손님이 주인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이 곳의 실질적인 주인의 모습은 카페를 통해서 느꼈던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한 달치 하숙비를 전액 미리 선불을 한 경우라 그런지, 다 잡아놓은 물고기에는 밥 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하숙집은 영업집이 아니라 그들의 가정집에 내가 얹혀사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정당하게 요구를 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아이였다.

그들에게는 한 살짜리 아이가 거추장스러웠고, 그런 약점을 알기에 불편해도 나는 더 이상 부당함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아들은 순했고 잘 울지도 않았지만, 아이는 아이였다.


방 안에 있을 때 아이가 보채기라도 하면 내 속이 타들어간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아이를 얼르고 달래야 했지만 통제가 쉽지는 않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내 몸 하나도 힘든 시기였다.

주인집 언니는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소소하게 나를 챙겨주고, 일이 없는 한가한 시간엔 나의 방에 찾아와 물어보지도 않은 자신의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남편이 시댁 식구들과 함께 하숙집을 방문하였다. 결혼을 하고 난 후 처음으로 보는 시댁 형님들은 좋은 인상에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주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이것저것 많이도 챙겨 왔다. 거기다 덤으로 하숙집에 잘 보이기 위해 필요한 물건을 장까지 보다 주었다. 멕시코에서는 한국음식에 필요한 장을 보기가 힘들기에 한국식품을 구하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건너가 샌디에이고에서 장을 봐야 했다.

엘에이나 어바인에 살고 있던 형님들은 구할 수 있는 식품들이 훨씬 많아서 종종 필요한 물건들을 부탁할 때마다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이 장을 봐주는 경향도 있었다. 그 속내는 아이와 함께 있는 나를 잘 봐달라고 하는 뇌물성 선심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이득만 취하고 달라지지는 않았다.


늦은 밤 소란이 일어났다.

잠을 깰 정도로 크게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상하게 남자 목소리만 들린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가 않았다. 무언가를 던져서 깨지는 소리도 들리기 시작한다.

아이가 깰까 봐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귀는 좀 더 잘 들리는 문 옆으로 가 있었다.

그런 일이 내가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간혹 생겼는데 , 남자는 자신의 형수인 사람에게 심한 욕설까지 퍼붓는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가 않았다. 그때마다 이 집 언니는 울었는지 다음날 아침을 보면 얼굴과 눈이 부어 있다.

나는 몹시도 그들의 가정사가 궁금했지만 물어볼 처지는 아니었다.

그날도 역시나 싸움이 일어난 후였다. 밖에서 김치를 담그고 있는 언니 곁에 살짝 다가가니 눈이 퉁퉁 부은 눈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과부의 넋두리가 시작됐다.

언니는 세련되게 이쁘게 생긴 사람이었다. 기도 세서 내공이 보통이 아닌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남편이 죽고 나서 딸아이 하나를 키우고 살았다.

그 애를 혼자서 키우느라 엄청 고생을 했는데 자신을 따라다니는 남자가 많았단다. 별의별 남자들이 다 꼬이더라고...

자신이 혼자라는 이유로 남자들이 자신을 쉽게 볼까 봐 한 번도 몸가짐을 흐트러지게 하질 않았고, 일을 하지 않는 날에도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다녔다 한다. 과부라고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비롯해 하나 있는 딸까지도 쉽게 볼까 봐서 더더욱 하루하루를 긴장하면서 살았다.


그러다 신학대학을 다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됐다. 그 당시 총각이었던 남편의 끈질긴 구애 끝에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남편을 따라 이 곳 시동생이 있는 곳으로 왔다.

자신의 돈이 들어간 이 집인데 실질적으로는 시동생이 사장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과부로 고등학생이 된 큰 딸을 데리고 총각 결혼을 한 이 언니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아들의 뜻을 꺾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같이 살지만 , 시어머니라는 공주 할머니는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틈만 나면 싸움을 일으키고 그걸 기회로 삼아 시동생은 형수를 사람 대우도 안 하고 욕을 하는 그들의 방식대로 그녀에게 화를 푸는 것이었다.


엄마와 딸의 고립이 아무 상관없는 나에게 까지 전해져 그들의 인생이 짠했다.

답답한 마음에 왜 그렇게 사냐고 물어보니...

그래도 남편 없이 혼자서 전전긍긍하면서 사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사는 게 훨씬 편하고 마음이 놓인다고 말을 하는 언니의 말속에, 지나온 그녀의 고단한 인생이 보여서 더 이상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과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서 비록 집안에서 힘은 없지만, 남편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된다는 그녀는 우리들에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혼자서 애를 키워봐서 안다고... 나를 이해를 많이 해 주었다.


항상 힘든 순간은 아무도 없을 때 잘 일어난다. 주말을 지내고 남편이 엘에이로 돌아간 후에 아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심한 열감기로 온몸이 열이 오르고 그 열이 가라앉지 않자 온 몸에 열꽃이 퍼지기 시작했다. 혼자인 나는 두려움에 아이가 어떻게라도 될까 봐 누구의 도움이 절실이 필요했지만, 그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나의 그런 사정을 알았는지 언니가 급하게 달려왔다.

놀란 나를 진정시키고 아이를 들쳐 없고 물수건을 가져와 아이를 벗겨놓고 닦아주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떨리고 두려운 마음은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 날 언니와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아이의 열이 내리기만 바라고 있었다.

열꽃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열은 잡히기 시작했다. 그 집에도 공주가 어려서 아무래도 나보다는 언니가 아이를 보는 건 한 수 위였다. 다행히 아이는 열이 내리고 나니 잠이 들기 시작하고 그제야 나는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남편이 없는 동안 그 밤을 아이를 안고 내 곁을 지켜주던 그녀... 나의 아들을 안고 나를 안심시키며 자신의 살아온 넋두리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그녀의 삶에서 위안받고 싶은 마음이 보여 고마우면서도 짠한 느낌이 들었다.


남편이 멕시코로 왔을 때 불편함과 서러움으로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다고 말을 하니 , 한 달을 채우지 말고 아파트가 구해지는 데로 이 곳을 나가자고 했다.

남편이 오는 날은 밖으로 나가서 밤이 늦게 돼서야 돌아왔다. 하숙집이 마치 지옥 같았다 나에게는...

마음이 이미 떠버린 곳은 더 이상 내가 머무를 곳이 아니었다.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들이 내 몸을 지치게 함과 동시에 모든 화살은 남편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