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의 아버지를 만나러 갑니다.

그리운 아버지에 대한 소중한 기억

by kseniya

갑자기 학원 주변이 온통 내 이름으로 도배를 했다. 사람이 찾아왔으니 빨리 1층으로 내려오라는 방송이 온 학원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마침 쉬는 시간이라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참에 내 이름이 방송으로 흘러나오자 약간의 창피함과 누가 나를 찾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내려갔다. 학원 입구에 오늘 아침 집에서도 본 낯익은 나의 아버지가 누군가를 찾는 눈빛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날 아침, 나는 엄마와 진로 문제로 심하게 다투고 밥도 먹지 않고 바로 학원으로 왔는데, 그것이 아버지는 무척이나 걸렸었나 보다. 엄마는 계집애가 재수도 아닌 그것도 삼수를 하는 것이 못 마땅해서 공부는 때려치우고 취직자리나 알아보고 돈 벌어 시집이나 가라고 나만 보면 성화였고 , 그런 나의 반항심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버지는 엄마의 잔소리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걸로 나의 편을 들어주었다. 공부나 잘하면 누가 뭐라 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나는 낮도 두꺼운 그런 딸이었다. 엄마는 현실적이었고 아버지는 이상적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해를 거듭할수록 사실 대입 입시는 더욱 힘들어지는 것은 많은 재수생들이 알고 있는 일이고 갈수록 지치고 힘들어지는 거에 비해 결과는 항상 그 밑에 있는 게 현실이었다. 나는 취직하라는 말이 나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 아니게 들렸다.

내가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는 입시학원은 종합학원과 단과학원의 두 가지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그중에 서대문에 위치한 두 곳의 단과학원을 과목이나 강사에 따라 번갈아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까운 곳의 학원에서 나를 찾았고 그곳에서도 나의 이름은 여지없이 불려졌을 것이다. 불러도 나오지 않는 딸의 부재를 알고 돌아서려는 순간, 나를 아는 학생이 내가 있는 학원을 알려주어서 아버지는 두 군데의 학원을 다 돌아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막연하게 찾아다녀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불편하다기보단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밥 먹으러 가자며 나를 이끌고 종근당 빌딩 안에 있는 고급 짜장면 집으로 향했다.

우리 가족은 서대문 토박이라 이 곳이 우리의 고향 같은 곳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는 오빠가 결혼을 하고 갓 시집온 올케가 계속 학업 중이라서 오빠네 학교가 있는 수원에 잠시 옮겨 살던 때였다. 오래 살던 동네라서 우리들에게는 익숙한 곳이었지만, 이 곳은 고급 중화요리 집이라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도 우리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던 그런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가 새우 짜장면을 시켜주는 것이었다.

아침을 거르고 심기가 불편하게 집을 나간 딸에게 맛있는 짜장면 한 그릇 먹이려고 한 시간을 넘게 올라온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는 항상 애교 많은 막내딸이 됐다. 조잘조잘 쉼 없이 떠들어대는 나만 바라보는 나의 아버지는 그런 내가 너무 안쓰럽고 애처로웠나 보다.


말없이 나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

말하면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다음 달 학원비가 들어있었고, 약간의 용돈을 함께 더 넣었는지 학원비보다는 좀 더 넉넉한 액수의 돈이 들어있었다. 앞으로는 아버지가 책임지고 학원비 내줄 테니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 나는 내 딸을 믿는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먹던 짜장면이 목에서 턱 하고 걸리는 느낌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이니 하나도 남기지 말라고 하면서 당신의 짜장면 속의 새우를 골라내어 듬뿍 덜어주는 내 아버지, 그 새우가 아버지에게도 먹고 싶은 음식이었을 텐데 나는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이래서 내리사랑이라고 하는가 보다. 끝없이 주는 부모한테 받은 사랑을 나는 내 자식들에게 똑같이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항상 내 옆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때론 친구처럼 때론 애인처럼 바늘과 실처럼 서로에게 없으면 안 되는.... 아버지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짜장면 한 그릇보다 아버지의 사랑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지금은 저승 갈 채비를 하는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버렸지만, 딸의 모습을 온전한 정신으로 하나라도 더 기억하고 담아가려는 모습으로 그때의 아버지만큼의 나이가 든 초로의 딸에게 가슴 아픈 사랑을 하나 더 보태고 있다.


내 어릴 적 친구 미자가 참 좋아했던 울 아버지!!!

초로의 나이에도 젊은 총각 같았던 아버지의 세련됨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는 정서 또한 그 당시 누구의 아버지보다 세련된 사람이었다. 영화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했던 아버지는 자신의 예술적 끼와 지성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고 같이 공유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주말의 명화가 시작되는 토요일 오후면 아버지는 그 영화에 대해 설명하기 바빴고, 나는 아버지의 영화에 대한 유식함 보다는 그 많은 영화를 어떻게 그 시대에 다 보고 다녔을까 하는 게 더 궁금했었다. 그런 아버지의 젊은 날의 유희덕에 나 또한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빨리 영화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고, 당시 방영했던 나탈리 우드와 워렌 비티의 청춘의 빛은 아직도 그 날의 그 느낌 그대로 아련하게 남아있다. 지금의 나의 엉뚱한 발상이나 삶의 자유로운 아이디어는 내 안에 끼와 문학에 대한 열정과 함께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이지 싶다.


자신의 딸이 누구의 아내로, 하루종일 설겆이로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이 보통의 아낙으로 사는 여성이 아니라 남자들과 동등하게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살기를 바랐던 아버지.

시간이 흘러 나는 아버지가 원하는 사람으로 살았고, 아버지의 자랑이 되었지만 나의 결혼이 늦어지자 아버지는 탄식을 하였다.

내 딸이 어디가 못나서 남자 하나 못 만나 저렇게 외롭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남몰래 울곤 하셨던 아버지.

역시 아버지도 보통의 남자이자 딸 가진 보통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가 바라던 그런 여성상으로 살고 있지는 않지만, 자식 중 가장 아버지를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딸이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5년 전의 그 짜장면은 훗날 살아가는데 나의 자존감을 굳게 지켜준 사랑이다.

그리고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 아버지는 내 안에 영원히 살아있다.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더 내 곁에 머물러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멀리 미국에서나마 아버지의 숨소리를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