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의 두 얼굴

by kseniya

핀란드에서 돌아오고 난 후,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을 하다 보면 항상 마주치는 상인들이 있다. 그들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한국을 제 집 드나들듯이 하는 상인들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왠지 옆집 사는 이웃처럼 편안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들이 보이지 않으면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하는 등 또 다른 정이 생기고 있었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상인들은 여행사의 단체로 모집해서 가이드가 이들을 인솔해서 들어와 물건을 사 가지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이리나라는 싸가지라고는 손톱만큼도 없게 생긴 차가운 여자가 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손님들을 인솔해 오는 가이드였다.

자기차를 사기 위해 나의 사무실에 들른 것이다.

오더도 참 싹수없게 한다. 나도 사무적으로 오더를 받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비교적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시간대만 잘 맞추면 차를 금세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전보다는 훨씬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예전만큼의 피크는 아닌 서서히 손님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폭풍이 오기 전의 고요함이랄까?

일주일이 지나고 이리나가 또다시 손님들을 데리고 한국을 왔다.

이번엔 사람들을 데리고 나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얼굴은 여전히 싹수없는 울상을 하고 앉았다. 웬일이냐고 하니 차를 사는 손님을 데리고 왔단다.

지난주에 자신이 집에 도착하니 차가 자기보다 더 먼저 도착해 있더라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한다.

그런 말은 좀 웃으면서 이야기해 주어도 되는데.. 아무튼 그녀는 좋게 말하면 시크한 여자였다


시간이 남아서 여유가 생기면 나는 원 사장님네 사무실도 한 번 들려보고 하는데 원 사장은 여전히 자리에 없다.

저녁 무렵 원 사장님과 함께 일할 당시 2층 다른 회사에 근무하던 세르게이를 만나러 갔다.

세르게이와 나의 사촌 사샤는 서로 의지하는 사이이기도 했는데, 예의 바르고 신사적인 세르게이는 그의 사장이 좋은 조건으로 그를 계속 붙들고 있어 한 회사에서만 오래도록 일하는 사이였다.

사할린 특유의 억양은 있지만 완벽한 한국말과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알아 바이어들에게도 단골이 많은 사람이었다. 신사적이고 예의 바른 그를 바이어들은 신뢰하고 좋아했다.

극동지역에서 공학도였던 그는 아는 것도 많았고, 참 다정다감한 남자였다.

일하는 시간이 끝나고 난 후 그의 사무실에서 우리는 만나서 그가 가지고 온 사할린식 노가리 같은 맛난 말린 생선을 안주 삼아 술자리가 시작됐다.

그러던 어느 순간 , 그의 옆에 레나라는 애 딸린 이혼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이 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외모만큼이나 깍쟁이 같고 밉상스러운 스타일이었다.

강수지 같은 스타일의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니는 그녀의 외모 부심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세르게이 옆에 찰떡같이 붙어있었다. 밉살스러운 그녀가 나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세르게이를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서로 사귀는 사이인 줄은 알지 못했다. 세르게이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우리들에게 한 적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사샤가 나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다고...

뭔 일인데.....

레나와 세르게이가 같이 사는 거 같은데, 세르게이가 레나를 때리는 거 같다고 말을 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어딜 봐서 세르게이가 여잘 때리냐.. 말도 안 되지, "

"그 깍쟁이 같은 레나가 잘도 맞고 살겠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한 기우는 기우가 아닌 현실이었다.

남자를 쥐고 흔들고 살 것 같았던 레나는 매일 맞고 사는 불쌍한 여자였고, 신사 같고 친절한 세르게이는 밤이 되면 자신의 여자를 개 패듯이 패는 악마 같은 남자였던 것이다.


한 번도 일을 나오지 않는 일이 없던 세르게이가 일을 나오지 않자, 사샤와 그의 집을 찾아 가보니, 세르게이가 아닌 레나가 나왔다.

전날 밤에 이미 한바탕을 치렀는지 레나의 얼굴에 피멍이 들어있었다. 세르게이는 집에 있었지만 나오질 않았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아는가 보다.

내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니 그 깍쟁이 같은 레나가 애원을 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그런 이렇게 계속 맞고 살 거냐고..

아직도 그를 사랑한단다. 알고 보니 이 여자 여리디 여린 천생 여자였다.

에고!!! 사랑이 뭔지.

내가 알던 세르게이, 그곳에서 일하면서 가장 믿음직스럽고 신사적이었던 그 세르게이가 악마의 얼굴을 하고 여자를 때리는 사람이었다니, 그 현장을 직접 보고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솔직히 사샤도 놀라는 눈치였다. 전혀 예상 못한 눈치였다.

몰랐냐고 하니 전혀 몰랐단다.

세르게이는 레나를 사귀지 시작하면서 레나가 다른 남자와의 술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레나가 남자만 만나고 들어오면 술을 마시고 레나를 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강도가 점점 세지면서 급기야는 수면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세르게이를 보질 못했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다. 내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돈의 힘으로, 무력의 힘으로 나약한 상대방을 누르려고 하는 비겁한 인간들...

세르게이도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때릴 때가 어딨다고.... 있어도 그렇지

나는 수도 없이 맞고 살았겠다. 그렇게 따지면..


길에서 보면 간간이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나는 레나를 보면서, 아직도 헤어지지 못하고 저러고 사는구나 싶어 그녀의 인생이 안쓰러웠다. 팔자 도둑 못한다더니 그녀의 선글라스가 더욱 시커매 보였다. 그녀의 인생을 꼭꼭 숨기고 싶은 마음이 보여서 그런지 말이다.

사랑이 뭐라고..... 밝은 대낮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도 못 할 정도로 수치심이 이는 삶을 살아야 할까?

같은 여자로서 이해도 되고, 같은 여자이기 때문에 속상하기도 했다.

세르게이 나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