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오랜 고민 끝에 가고자 하는 결심을 하고 나니 잠이 오질 않았다. 밤잠을 설치며 새벽부터 일어나 앉아 비행기표를 알아보느라 컴퓨터를 켰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미국 도시 중에서도 비행기값이 가장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다.
직항으로 갈 수 있는 국적기가 수시로 드나들지만, 델타 항공과 가격담합을 통하여 미국 내에서 가장 비싼 항공료로 악명 높은 곳이다.
나의 경제상황으로는 정상적인 가격으로는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이리저리 찾아보니 아직도 내 마일리지가 소멸되지 않고 편도로 갈 수 있는 마일이 살아있었다.
그나마 마일로는 비수기 적용 마일이 다른 주와 동일한 마일로 책정되기에, 이곳에서는 비수기 기준 마일리지로 티켓을 끊는 것이 경제적이다. 비록 유류할증료가 또 붙어 어느 정도는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그게 어딘가?
다행히도 비수기 시즌이라 마일리지로 예매할 수 있는 좌석도 충분하다. 돌아오는 표는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자!
마일리지를 확인해 놓고 이제 쇼핑을 해야지..
가장 떨리고 기쁜 순간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부담스러운 마음이 무엇인지...
십오 년 만에 가는 발걸음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걸렸다.
가장 먼저 부모님께 필요한 것들을 살 때는 기쁘고 날아갈 것 같던 마음이 한 사람 한 사람 늘어감에 따라 김이 새 버렸다.
쇼핑을 하다가 의기소침해져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십오 년 만의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코스코를 다녀와 침대에 들어 누워 버렸다.
가지 말까? 마음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엄마는 왜 빨리 비행기 표를 끊지 않느냐고 아우성이다.
아무것도 사지 말고 옷만 입은 채로 그대로 오란다. 모든 것은 한국에서 다 준비해 줄 테니 말 그대로 몸만 오라고 한다.
선물이니 뭐니 아무것도 사지 말고 그냥 나오기만 하라는 부모...
그래도....
사실 지금은 한국이 워낙 좋은 것들이 많아 미국에서 살 거라곤 그다지 많지는 않다.
이미 한국에 다 들어가 있는 것이고 기껏 해봐야 가성비 대비 그나마 괞챦은 것은 비타민 정도.. 하다못해 그 흔한 베스킨 라킨 라빈슨도 한국에 들어가면 가보고 싶은 핫플이 되어버리는 신기한 마술.. 여기서는 미국 슈퍼에 있는 작은 냉동칸에 몇 개만이 구석에 덩그러니 처박혀 있는 평범한 아이스크림 정도인데 말이다… 아마도 나도 시청역 근처 덕수궁 옆길에 위치한 던킨을 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싼 걸 사주자니 표도 안 나고, 내 경제적 상황에 비싼 선물은 언감생시 가능하지도 않다.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것도 사주고 싶고 저것도 사주고 싶다.
이런 마음 저런 마음으로 차일피일 미루다시피 한 며칠 사이 나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불안감만 조성하게 되었다.
다시 켜든 마일리지 현황..
이번엔 표를 예매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나의 마일리지 현황에 들어가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있었던 나의 마일리지에 잔여 마일리지가 0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어떻게 내 마일리지가 보이질 않지..
몇 번을 돌리고 봐도 0이라는 숫자가 사라지지가 않았다.
가족합산 연계가 되어있던 나의 마일리지를 가족 중 누군가가 사용한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였다.
가해자가 없는 피해자만 생긴 상황이 되었지만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 마일리지가 없으면 한국을 나가는 꿈이 무산되지만, 어머니는 마일리지뿐만 아니라 서부에서의 비행기요금은 여기와는 달리 그리 비싼 가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먼저 한국행 표를 마일리지로 끊어 버린 것이었다.
어머니잘못이라고 하기엔 어머닌 항상 재수가 좋은 사람이었고, 나는 항상 이런 식으로 재수가 더럽게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원망스럽다.
다시 제자리다. 가지 말라는 신호처럼 들렸다.
방 한가운데 그동안 사서 모아놓은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
이틀 동안 들뜬 나의 마음이 헝클어져 있는 듯한 형상이다.
항상 그랬다.
없는 사람에게는 더 없는 상황이 되고, 있는 사람에게는 가벼운 아무렇지도 않게 더 얹히는 상황이 반복되는 생활들이었다.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하고 병들게 하는 이런 순간들이 나는 너무 싫다.
있는 사람에게는 작은 것이 나에게는 아주 큰 것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없는 상황..
또다시 나는 재수가 없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
처음부터 돈을 주고 비행기표를 사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럴 형편도 아닌 시기라...
화난 가슴이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녀보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카드 포인트가 생각이 났다.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든 포인트가 제법 쌓여있었다.
포인트 적립 사이트를 통해 들어가 비행기표를 보니 싼 티켓이 하나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번엔 비행시간이 걸렸다,
포인트를 통해 구매를 하면 비용은 어떻게 해결이 되는데 무엇보다도 긴 비행시간이 걸렸다.
만약 내가 공황장애가 없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일부러라도 구매했을 아주 좋은 조건의 티켓이었다.
싼 항공료와 더불어 터키시내 구시가지 히스토릭 지역을 관광까지 무료로 시켜준다니 솔직히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부러라도 들러서 갈 좋은 조건의 내용이었다.
갈등이 생겼다. 터키는 솔직히 내 마음속 언젠가 한 번은 가 보고 싶은 나라 중에 하나였다.
마음을 다잡고 쉬어간다는 마음으로 도전을 해 볼까?
비행기를 갈아타는 건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잖아
아니야 가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마음속 두 마음이 서로 속삭이듯 다투고 있었다.
세월은 나답지 않은 비겁한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 악명 높다던 멕시코시티도 혼자서 날아가 씩씩하게 혼자 다녔던 난데.. 그 어마무시한 시베리아 혹한에도 혼자서 잘 날아다니던 난데.. 왜 이리 약해졌을까? 크렘린궁을 가기 위해서 반공호 같은 굴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던 모스크바의 지하철역을 혼자서도 얼마든지 다니던 나의 젊은 시절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세월은 어찌 나를 이리 비겁한 겁쟁이를 만들어버렸을까. 뭐가 그리 아쉬운 나이라고....
한국에서 기다리는 지인은 갈팡질팡 하던 나를 이해하듯이 한마디 툭 던진다.
자기야!
공황장애라고 해서 죽을 것 같지만 결론은 죽지는 않아.
긴 공황장애의 터널을 거쳐 이제는 터키를 통해 그리스까지 여행을 다녀온 그녀의 조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