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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안정되어 보이고 마음에도 전과 다른 평화가 왔지만, 바다 위에 불안하게 떠 있는 배처럼 가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착에 대해선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서서히 지쳐가고 있을 무렵, 미국에 사는 시부모님들을 비롯해서 남편의 형제들은 우리가 사는 방식에 대해서 불안함과 안쓰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고립되어 있는 나와 아이들로 인해 비교적 자유스러운 미국 식구들은 틈만 나면 멕시코 국경을 넘어 우리를 방문하곤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나라 간을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은 말이다.
큰 형님은 미국에서 간호사일을 하고 있었다. 쉬는 날이 되면 2시간 거리의 국경을 넘어 우리를 보러 오곤 하셨다. 나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점심을 사 들고 오는 배려심과 함께....
"동서! 멕시코 국경을 넘어올 때는 설렘으로 넘어오지만 반대로 미국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면 또다시 남아야 하는 우리 가족을 보면 발걸음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아서 오고 싶지 않아!!
한 번은 온 가족이 멕시코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시간에 큰 아이가 없어졌다.
분명히 인사를 하고 내 옆에 있었던 아들이 없어진 것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난 후에 큰 아빠의 차 안에 들어가 밑에 숨어 있던 걸 발견했다.
자기도 따라가려고 그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누구라도 할 것 없이 그 기막힌 아쉬움에 눈가가 먹먹해지는 순간이었다.
대식구들의 행렬에 자신의 아빠까지 사라지고 나면 텅 빈 집에 또다시 우리 셋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러한 순간들이 반복되고 있는 중에 큰 형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동서! 동서가 너무 이기적인 거 같다.
동서가 결정을 하면 우리가 백방으로 알아볼 테니 미국으로 넘어오는 거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이유였다.
그 무렵 형님과 같이 일하는 동료들 중에는 멕시코에 친척들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의 안쓰러움을 형님이 이야기를 했는지 다들 나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중의 한 동료가 무조건 100프로 성공하는 루트를 알고 있다며, 왜 미련스럽게 그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형님을 부추겼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 당시 멕시코 국경은 겉으로 보기엔 닫혀 있었지만, 그 밑으로 이어진 땅속의 국경은 허술했던 것이다.
다들 그 밑에 뚫려 있는 땅굴로 국경을 이동해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사례가 뉴스를 통해서 보이곤 했었다.
실제로는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 사이에 집이 하나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 집 땅속에 어마한 땅굴이 파져 있다는 소문도 엄청나게 들리기도 했다.
시어머니도 애가 탄지 백방으로 알아보고 돈은 우리가 알아서 마련해 줄 테니 결심을 하라고 여기저기서 나의 결정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끄덕하지도 않았던 나의 뚝심도 서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서로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눈 한 번 딱 감고 결정을 해보자는 형님의 말에 처음엔 나 역시 단호했다.
형님의 입장에서 보면 국경을 넘어온 성공한 사람들만 보이니 단연 100%로의 성공률이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매번 잡히는 뉴스만 보이니 성공에 대한 확신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높은 것이라는 말로 나의 입장을 대변했다.
애들을 생각해 보라는 형님의 말에 애들을 생각하기에 그러는 거라는 말로 반박을 했다.
나 혼자라면 어찌 감수해 보겠지만, 평생을 미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추호라도 허점을 남기지 않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더더욱 나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급기야는 남편도 힘이 들었는지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자고.....
이렇게 이어진 생활이 2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서로가 지쳐가고 있었다.
철옹성 같이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가정들도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인생에서, 뜬 구름 같은 불안한 우리 가정의 상황은 누가 봐도 위태해 보였던 것이다.
서서히 지쳐가던 나의 심경에도 변화가 왔다.
한 번 시도를 해 볼까?
눈 한 번 딱 감고?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교회의 목사가 우리들의 사정을 알고 접근을 했다.
자신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하면서 넘어갈 의향이 있으면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브로커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는 미국에서 살면서 주말에만 멕시코로 넘어와 주일에는 교회일을 하고, 나머지 주중에는 이런저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급기야는 시어머니와 목사가 미국에서 만났다.
두당 만불에 우리를 미국으로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두당 만불이라는 물건 같은 사람들이었다.
시어머니는 돈은 이미 중요하지가 않았다.
막내아들의 불안정한 가정이 아들을 볼 때마다 안쓰러웠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어린아이들이 밟히기도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돈을 만들어 줄 테니 넘어오라고....
평일에 목사가 찾아왔다.
어떻게 넘어가고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알려주고 안전하다고 나를 안심시키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넘어가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러 친정 부모님이 멕시코에 머물러 있었다.
아버지는 자그마한 법이라도 어기는 법이 없던 사람이고, 나 또한 법을 어기는 거에는 단호한 사람이었지만 , 이번에는 친정아버지는 아무 말을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시어머니와 같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눈 한 번 딱 감아보자!
자신보다 더 단호한 딸아이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간절함과 불안함이 다 들어있었다.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아버지는 말을 아꼈다.
전적으로 나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일은 진행이 되어 가고 있었고, 마치 전장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비장함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목사와의 이야기가 오고 가는 중에 목사에게 연락이 왔다.
일이 불발이 되었다고 했다.
일행 중에 아이가 끼여 있어서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 혹시라도 이동 중에 소리라도 나면 다른 일행에게 피해를 갈 수도 있기에 거절을 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실망감보다는 오히려 나의 가슴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무렵 멕시코 티브이에서는 국경을 넘어 오려다 걸린 밀입국자들의 상황을 보여 주었는데, 너무나 웃겼던 장면이 나왔다.
캐나다 국경을 통해서 들어오던 밀입국자였는데, 버스의 좌석 시트를 개조해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고 나서 국경을 통과하려고 했던 것이다.
기발한 생각과 어이없이 마구 웃었던 기억이 난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 뉴스를 보고 나니 나의 마음은 더 힘들어졌다.
갈수록 기발 해지는 밀입국자들과 거기게 맞게 집요하게 찾아내는 국경수비대!!!!
어떻게 뚫고 성공을 한다는 것인지....
평소 캘리포니아가 자신의 땅이라고 인식하듯이 , 잡히면 보호소에 3일 있다 다시 돌아가 성공할 때까지 계속되는 잃을 것 없는 그들의 상황과, 한 번 잡히면 인생 자체가 되돌릴 수도 없는 잃을 것이 많은 나의 상황과 그들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이번엔 형님에게 전화가 왔다.
100프로 성공할 수밖에 없으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자신의 동료가 이야기해 준대로 형님은 설명을 해 주었다.
미국 중개인과 멕시코와 다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시간에 모종의 컨택이 있기 때문에 국경에서 무사히 넘어올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 당시 국경은 랜덤으로 여권 검사를 했기 때문에 복불복이 많았다.
국경 수비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교대 시간에 맞춰 대기하고 있다가 넘겨주는 것이었다.
목사가 추천한 방법은 밤 시간대를 이용해 파 놓은 지하 동굴을 이용해 넘어가는 것이었고, 이번엔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는 과감한 방법이었다. 모종의 컨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굴을 기어가는 것보다는 과감한 방법이었지만 성공률은 헐씬 많은 방법이었다.
형님은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뛰고 온 몸은 이유 없이 떨리고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 이 방 저 방 걸어 다니며 안정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조금씩 살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불안하면 커피를 들이마시는 습관이 나에게는 있었다.
하루 종일 커피를 들이마시며 카페인의 영향으로 악순환을 반복해야만 하던 날들이 계속되었다.
전화를 기다리다가도 제발 전화가 오지 말았으면 하는 상반된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무수히 싸우고 있었다.
드디어 전화가 울렸다.
오늘 6시까지 소나 리오 지역에 위치한 쇼핑몰로 집결을 하라는 이야기였다
온몸이 떨렸다.
나에게는 역사적인 순간이 될 수도 있는 그 날의 떨림!!!!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문뜩 그날의 떨림이 기억난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나의 온몸은 떨렸다.
이러다 큰 일 날 것 같은 나의 아버지도 덩달아 떨고 있었다.
매시간마다 , 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나 지금 떨고 있는 거지?"
드디어 아버지가 울어버린다
"그냥 다 포기하자
미국 안 들어가면 어떠냐
이러다 사람 하나 죽어나가겠다
하지 말자!!!
사람이 살고 봐야지 이 짓을 어찌한 단말인가?
그냥 법대로 살자!!!
어쩌다 내 딸이....."
옆에 아이들을 재우려고 애쓰던 엄마도 덩달아 사시나무 떨듯 떨며 허공만 바라보고 누워있던 딸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져버렸다.
우리 마음 약한 김 씨 가족들은 사시나무 떨듯 누워있는 딸의 모습이 기가 찬 지, 죄를 지으면 얼굴의 표정으로 알려주는 약 심장인 우리 가족에겐 밀입국이라는 일은 너무나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초조하게 미국에서 기다리는 남편의 가족들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니였을까 싶다.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지만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그 전화 대신 형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계획이 바뀌었단다. 역시 아이들이 걸림돌이었다.
이상하게도 떨리던 나의 몸이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