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 siento o Yo no se!

미안하지만 난 몰라요!

by kseniya

평생에 언제 이런 호사를 한 번 누릴까 싶을 만큼 바닷가 근처의 하얀 집에서 꿈같은 생활이 시작되었다. 체념이라고 하기보단 이 사치를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멕시코로 온 이후 불안했던 마음들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나의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는 이제까지 잊혀졌던 나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친 육아에서 벗어나 나를 위한 생활을 가져 보고 싶었다.


교회에서 만난 새로운 가족인 영기 엄마가 나의 집에 초대를 받아 오며, 그녀의 남편 회사에 다니는 또 다른 한국 엄마인 병주 엄마를 같이 데리고 와 나에게 소개를 시켜주었다.

깨끗하고 전혀 다른 환경인 아파트를 보고 , 자신도 이 곳으로 이사를 오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매력적이었다.

단지 한 가지 단점이라면 이 도시에서 한국 사람들은 도시의 초입에 모여 살고 있었다. 이 곳에서도 나는 역시 그들과 달리 혼자 고립되어 사소한 도움이나 한국 사람들과의 소통이 예전과 다르지 않게 쉽지 않았다.

그나마 교회에서 사귄 젊은 엄마들이 교회가 있는 이 곳과 가까워 주일에 예배가 끝나고 나면, 우리 집에 자연스럽게 모여

아이들과 지내다 자신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그들은 멕시코에서의 생활에 항상 무료해 보였고. 이 모습은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모습들이었다.

그들에게 멕시코는 미국을 가기 위한 인내의 공간으로 거쳐가는 곳이었다. 그런 기간에 나의 집은 그들에게 무료함을 덜어 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으며, 풍부한 음식들이 끝없이 나오는 흔하지 않은 입의 호강까지도 제공되는 공간들이었다. 그 사소한 호사에 익숙해져서 자신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나타나기도 해서 우리 집은 항상 시끌벅적한 곳이 되었다.

어느 법사의 말을 빌리자면 인복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손만 커서 사람들을 불러놓고 해 먹이는 사람이라는데 나 역시도 이 부류다. 나는 몹시도 헤프다. 남편 역시 퍼 주는 사람이다. 퍼 줄게 없어 탈이지만, 멕시코에 올 때마다 갈비를 한 박스씩 궤짝으로 사 오는 날이면, 그 날은 내 주변 사람들이 호강을 하는 날이다. 나는 어느새 멕시코에서 음식 전도사가 되어 있었다.

손맛은 내가 타고난 또 하나의 큰 재능이었다.


영기 엄마와 병주 엄마는 그 당시 오타이에 위치해 있는 대학에서 스페인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이 곳에 오자마자 여기저기 들리던 스페인어는 영어와 겹치는 단어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려워 보이는 언어는 아닌 듯 보였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현지인들과의 유대는 거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다만 여기저기 들리는 단어들 중에 유독 "께"(que)라는 소리는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영어로는 " what"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 하나만으로도 스페인어가 가능할 정도로 많이 쓰이는 단어였다.

이 곳 저곳에서 들리는 이 단어가 익숙해지면서 어느 정도 스페인어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영어와는 달리 오히려 쉽게 철자에 따라 읽기만 하면 된다는 스페인어는 영어의 연장선상으로 배우기는 그다지 어려운 언어가 아니었다.

멕시코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어느 날, 이미 엘에이에서 멕시칸들과 관계가 익숙한 남편이 지나가는 구급차의 이머전시가 적혀 있는 단어를 철자 그대로 읽어보라고 하였다.

신기하게도 이머전시에 익숙해져 있던 이 단어가 소리 나는 데로 읽어보니 전혀 생소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철자는 비슷한데 발음이 전혀 다르게 나왔던 것이다.

에메르헨시아!


시간이 가는 듯 안 가는 듯했지만, 아이들이 눈에 띄게 자라는 것으로 보니 세월은 가고 있었다. 엄마의 손 안에서 떨어지기 힘든 어린아이들이었지만, 이제 나를 위한 시간도 중요했다.

비교적 일찍부터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환경이라서 어렵지 않게 좋은 유치원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침 시간에 아이 둘을 맡기고 나자, 오전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었다. 숨통이 탁 트이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알게 된 페루에서 사역을 하시던 목사 사모와 함께 영기 엄마가 다니던 대학에서 스페인어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점차 이 곳에서의 생활에 적응이 되기 시작하였다.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주로 주재원들 와이프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국 사람들이었다. 다시 돌아온 듯한 캠퍼스의 공기는 나를 살아있게 해 주었고, 그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또 다른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오전 중에 육아에서 어느 정도 해방이 되고 여유가 생기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파트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있던 하이메라는 멕시코 청년이 마당을 쓸고 있는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보면, 빗자루가 마당을 쓰는지 마당이 빗자루를 쓰는지 모를 정도로 모든 일들이 느리게 진행이 되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나는 한국 사람들 같았으면 숨넘어갈 사람 참 많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급한 민족들 사이에서도 유달리 급하고 부지런한 한국 사람들이 멕시코에 오면 심장 마비 일어날 일이 참 많이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멕시코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나라로 스페인의 문화가 많이 퍼져있었다. 아직도 그 문화의 잔상이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그 역사 속의 심리적인 상태 또한 아직까지도 그들의 정신에 남아있었다.


어느 날 아파트에 문제가 생겨 나는 하이메에게 그 상태를 알리고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같은 문제를 가지고 반복해서 이야기를 해야 했다.,

급기야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화가 나자, 하이메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의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 미안하다는 말이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말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말이 되어 그 말과 함께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런 연유로 이들은 절대로 웬만해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로시엔또! 이 말 대신에 무조건 모른다고 끝까지 우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Lo Siento! 대신에 무조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Yo No Se!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 이유이다.

그 이후에도 나는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는 여간 쉽지가 않았다.

누가 보아도 뻔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상대방이 열을 받아 씩씩거려도 시종일관 나는 모른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감추어 버리곤 했다. 그들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도가 지나치는 그들의 모르쇠로 일관하는 행동들은 뻔뻔함을 넘어 상대방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 문제였다.


다음 에피소드로 나오겠지만, 멕시코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살다 살다 전기를 훔치는 도둑도 있다는 사실 또한 분노를 넘어 살기를 느끼게 할 정도로 뻔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과연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날까 싶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하고, 그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듯이 현지인들은 그런 일들에 무감각해지기도 했다.

그 안에는 몸서리쳐 질정도로 절대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도 존재하고,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나 존재하는 그런 일도 일어나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기준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갈 거라고 우리는 생각을 하고 산다. 그 반대 편의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바닷가에서 유유자적한 사치를 누리고 있는 동안, 아이에게 먹일 것이 없어 새벽녘에 쓰레기통을 뒤져 자신의 아이들에게 먹이는 부모도 있다는 사실을 다른 이에게 듣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부자가 가난한 이의 삶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듯이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의 일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멕시코에서 너무나도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실제로 멕시코는 빈부의 격차가 아주 심한 나라였다.


멕시코에 도착하자마자 아직까지 우리 가족은 멕시코라는 나라가 그렇게 위험한 지도,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다들 넉넉하게 바닷가를 산책하며, 물가 싼 이 곳에서 걱정 없이 살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을 바꿔버리는 날이 조만간 경험하게 되는 상상도 못 한 채,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