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손은 항상 바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양손에 가득 들려져 있는 봉지 꾸러미를 보며, 그 날이 월급날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비가 오는 주말이면 아버지는 항상 우리들을 먹일 간식을 만들곤 했는데 , 아직도 생각나는 것이 연근튀김과 우엉 튀김을 주로 많이 해 주었던 것 같다. 집안 가득 나는 기름 냄새는 아직도 내 기억 속 행복의 냄새로 채워져 있다.
우리 삼 남매들이 소풍을 가는 날이면 아버지의 손은 더욱더 바빠졌다. 엄마가 미리 준비해놓은 김밥 재료들을 가지고 김밥을 마는 건 아버지의 권한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김밥을 싸 놓고 일을 나가셨던 아버지의 가장 큰 낙이자 행복이었다.
김밥을 싸기 힘든 경우엔 볶음밥을 만들어서, 그 위에 케첩을 얹어, 까만 깨로 하트를 만들어 넣어주기도 했다.
젊은 시절이 지나고, 우리들이 커 갈 무렵엔 아버진 손으로 항상 무언가를 쓰셨다.
일본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주로 했는데, 그것이 두 가지 언어를 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지금도 일본어를 원어민만큼 잘한다.
항상 아버지의 손은 부지런하고 바빴다.
내가 러시아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도 평생에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물 지어 나르기 , 밭에서 호미질하기 등등 , 나를 대신해서 나의 공부에 방해될 까 봐서, 자신에게도 서투른 일들을 했다.
한국에서 러시아 관련 일을 할 때는, 아버지는 내가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나의 짐꾼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는 손주들의 목욕을 부정 탄다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아버지 혼자서 아주 경건하게 아기를 씻겼다. 도대체 어떻게 씻기길래 저렇게 유 별스러울까 싶어 엄마와 내가 지켜보니, 그 당시 나의 첫애가 많이 작았다.
행여나 아기가 물속에서 미끄러질까 봐 옷도 벗기지 않고 , 조심스럽게 , 아주 천천히 , 아기 머리부터 씻기고 , 그다음엔 아이가 혹여라도 감기 들지 않게 작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아놓고 나서, 몸을 천천히 씻기고 말리고 나면, 아버지의 신성한 의식은 끝이 난다. 그 손으로 또 손주들 간식거리를 직접 만들어 주는 그런 자상한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다.
손으로 하는 건 웬만해선 다 잘했던 울 아버지...
내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딸을 위해 아침마다 커피 한 잔을 말없이 가져다 놓는 것도 아버지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혹자는 버릇없는 딸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아버지의 기쁨인 것을 알기에, 나는 더욱더 심하게 아버지를 부려먹었다. 그럴수록 아버지의 얼굴엔 항상 행복감이 더 늘어난다.
열무 비빔밥이 당기던 나를 위해, 열무 비빔밥을 항시 대기해 놓고 있었다. 두부를 넣고 끓인 된장찌개에다가 콩나물과 열무김치를 넣어 만든, 아버지표 열무비빔밥은 이 세상에서 최고다.
그러던 어느 날 , 극심한 고통과 함께 찾아온 대상포진으로 아버지의 왼손이 망가져가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손일까?
나는 항상 고통스럽고 의문스러웠다.
나이 70이 넘어서 까지도 지하철의 경로석을 한 번도 앉아보지 않던 나의 아버지에게...
나이 80이 넘어 혼자 배낭여행을 할 정도로 젊었던, 나의 아버지에게 왜 이런 천형을 내렸을까?
아버지가 밤마다 앓을 때마다, 나는 안타까움으로 항상 생각했다. 아버지의 저 금손도 죽으면 썩어가겠지...
5년간의 살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지금까지도 그 고통 속에서 아직도 힘들어하는 아버지.
2년 전 , 마지막으로 난 아버지가 아무래도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 비행기 표를 끊어 아버지를 이 곳으로 오게 했다. 아니 아버지가 더 오고 싶어 했다.
항상 우리 집에 오면 가만히 있지 않았던 아버지다. 딸이 조금이라도 힘들지 않게 김치 담을 거리를 , 새벽에 일어나면 씻어서 담기만 할 수 있게 다듬어 놓았던 그 고운손.
결혼 전에 딸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 줄 알았던 아버지에게, 부엌일에 찌들어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는, 딸의 인생을 말없이 지켜봐야 하는 아버지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은 딸의 노동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었다.
그 고운손이 망가지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더 이상 딸의 일을 도울 수가 없어서 절망했다.
아직은 나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손의 고통은 오래가고 나아지지도 않았다.
그 아버지가 나의 집에 마지막으로 와서 아버지의 정원을 만들어 놓고 갔다.
하루하루 돌을 채워 돌로 만든 정원을 만들고... 여기저기 고물 거리를 가져와 쓸만한 것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예전의 능숙한 아버지의 손이 아닌, 반쪽만이 남아 있는 손을 가지고 아픈 손의 아픔을 참아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완성된 우리 집 보물들이 우리 집 여기저기에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작품들이 있다.
토마토 지지대로 쓰다 버린 거에 지끈을 감아 거실 스탠드를 만들고, 금이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수반을 , 신문에 풀을 먹여 똬리를 틀어 색다른 수반을 만들기도 하고, 애들 장난감 겉포장으로 남은 원통형 투명 비닐 박스로, 꽃을 담아 놓아 놓을 수 있는 대형 꽃꽂이 통을 만들어 놓았다. 이 역시 신문을 이용한 지공예다. 거칠고 작품성은 떨어지지만, 아버지의 손길이 묻어 있어 버릴 수가 없다.
비록 깨지고 쓰다만 물건으로 만든 것들이지만, 그 어느 가게의 비싼 것보다 값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