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에 겨울이 시작되면, 앞으로 6개월은 온통 하얀 세상만 보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하얀색 딱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반년이란 세월을....
눈이 내려 그 눈이 강추위에 내리자마자 얼어붙었다. 그 위에 또 계속해서 내리는 눈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단단한 언덕이 되어버렸다. 봄이 되어 서서히 녹아내릴 때까지기다려야 겨울 내내 언덕이 되었던 그 형체가 물로 희석되어 사라지는 것이었다.
매일이 그 날 같은 창살 없는 감옥이 시작된 것이다.
눈보라가 치고 온 세상이 꽁꽁 얼어도
그런데 신기한 게 이렇게 추우면 학교는 문을 열까?
당연히 연다. 비록 버스나 트람바이 전차가 이상이 생겨 운행을 중지하더라도, 학교는 겨울 내내 문을 연다. 딱히 할 수 있는 야외활동도 없으니 , 더욱더 학업에 매진할 수 있다는 생각이기도 한 것 같았다.
아침에 내 몸집보다 큰 짐승의 털인 겉옷을 입고, 머리에도 짐승의 털로 만들어진 샤프카를 쓰고, 마치 뒷모습은 영락없는 짐승의 모습을 하고 뒤적뒤적 눈 길을 헤쳐 학교를 갔다.
눈길을 걷다 내 몸무게에 못 이겨 중심을 못 잡고 눈구덩이에 빠지기도 무수히 많다. 눈은 내 무릎을 올라오고 , 사람이 가는 곳만이 길이 되어 있을 뿐, 양옆으로는 눈언덕이었다.
매서운 눈바람이 날리는 바깥의 세상과 달리 , 학교 안은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러시아 학생들로 시끌벅적했다. 혹시 시험기간 이기라도 하면, 복도에 긴 줄로 늘어서 저마다 각자 손에 작은 메모장을 들고, 열심히 암기를 하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젊은 러시아 친구들은 열심히 공부에 몰두했다.이 곳의 학과 과정도 암기하는 것이 많다. 토론식 보다는 주입식 수업이 훨씬 더 강하다. 딱히 우리나라 교육방식만그런 것은 아니었다. 인나 역시 항상 갈 때마다 보면 무언가를 외우고 있었다. 러시아의 기초학문의 위대한 과학자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겨울이 긴 날씨 또한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러시아의 장편소설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러시아의 길고 우울한 겨울 날씨 때문이라는 말도 있듯이...
평균기온이 영하 20도는 기본으로 웃도는 겨울 날씨중에
딱 한 번 휴교령이 내린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기온이 영하 38도였다.
그 날은 평상시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까지 겹쳐 체감온도는 장난이 아니었다. 너무 추워서 울어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더 고통스러운것은 울다 눈물이 나면 바로 얼어버려얼굴에 그대로 고드름이 생겨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더 곤혹이었다. 말로만 듣던 시베리아에서 오줌을 누면, 그 자리에서얼어버린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순진한 아이들의 세계로
겨울날의 수업이 끝나고 나면, 간절히 따뜻한 집이 그리워지는 게 당연한데 그 겨울 무렵부터, 나는 집이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일을 하는 욜야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집에 돌아가도, 여전히 나는 혼자서 밤이 될 때까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있어야 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온통 하얀 눈의 단조로움은 , 한국에 있는 엄마,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을 만큼 향수병을 일으켰다. 처음과는 다르게 올야는 대면 대면하게 굴었고, 나는 더 이상 이 집이 편하지가 않았다. 서울의 집이 그리웠지만 참아야 했다. 하루하루가 데칼코마니 같은 똑같은 날들..... 올야와의 갈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좁혀지지 않고, 곪은 살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기 전에 갈등을 하다가 세 정거장 전에 내린다. 정거장 근처에 토르틔 가게에 들러 러시아식 케이크를 샀다. 발걸음은 저절로 사샤네 집으로 향한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집안의 온도는 반팔을 입고 있을 정도로 난방은 잘 되어 있기에,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만 참으면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사샤가 밤을 새는 경우, 인나는 그 큰집에서 겨울을 혼자서 지냈다.
내가 가면 인나는 러시아식 난로인 페치카에 석탄을 더 집어넣어, 집안을 따뜻하게 만들어, 집에서 가장 따뜻한 곳으로 나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사샤네 집은 국가 난방 시스템이 아니라서 페치카에 직접 석탄을 가지고 와서 불을 떼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미 올야네 동네는 국가 난방 시스템이 되어 있어서 저절로 난방이 되는 시스템이었다. 만약 이 난방시스템이 이 한겨울에 고장이라도 나기 시작하면, 정말 얼어 죽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내가 생활할 당시 실지로 난방이 되지 않아 , 늙은 노인들이 혼자 살다가 동사한 경우가 신문에 나오기도 했다.
토르틔를 사 온 걸 알면, 이제 동네 꼬마 녀석들이 모이기 시작할 것이다.
인나가 옆집 다니엘을 부르면, 다니엘은 또 자기 친구를 데리고 왔다. 그러면 바로 옆동네 가짜 언니 애들이 하나둘 씩 내가 온 줄 알고 인나네로 모여들었다. 어느새 페치카 앞은 아이들로 둘러 쌇여 있었다. 내가 가면 사샤네 집은 동네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나는 케익 하나로 이 동네 골목대장이 되어 있었다.
순진한 아이들은 토르틔가 먹고 싶어서 그런 건지, 이방인처럼 생긴 내가 조금은 두려워서 그런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꼬마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 쉬운 단어들로 또박또박 발음하는 아이들의 대화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언어를 익혀나갈 수 있었다. 아주 공부하기 좋은 방법이기도 해서 가끔 이렇게 불러 모이게 하곤 했다. 순서대로 앉아 애들 수대로 자른 케이크를 공평하게 나누어주었다. 아아들에게 음식만큼 행복하게 하는 일이 있을까?
아이들의 행복한 미소가 페치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겨울 밤하늘을 누비다.
이 날은 갑자기 밤에 물을 길어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인나가 물이 다 떨어져 간다 해서 옆동네로 원정을 가기로 했다.
아이들이 옷을 갈아입고 오는 동안 , 우리는 빈 물통 두 개를 손수레에 실었다.
아이들이 오자마자 우리는 수레를 끌고 옆동네로 물을 길어 갔다. 가는 길에 아이들은 수레에 나를 태우고 신나게 뒤에서 밀어준다. 세상이 온통 하얀 밭에 자그마한 아이들이 나이 든 소녀를 태우고 신나게 질주했다. 밤하늘의 별들은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겨울 밤하늘의 별은 유난히 더 밝아 보였다. 소복소복 쌓이는 눈이 그 별빛에 더 하얗게 빛났다.
조금 먼 거리에 물이 나오는 공동 수도시설에 도착해, 우리는 물을 싣고 다시 오던 길을 돌아오고 있었다. 아이들의 볼은 추위에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표정은 어쩜 이리도 밝은지... 길에는 우리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수레가 움직일 때마다 집집마다 개 짖는 소리만이우리의 존재를 알려 줄 뿐이었다.동화 속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모초럼 나에게도 천진하게 동심으로 돌아가 웃을 수 있었던 날이었다. 아침에 우울했던 감정들이 잠시나마 수그러들었다. 아이들 속에 파묻혀 감정을 추스른다.
만화 속 파트랴수의 개가 생각나던 그 날.. 동네 꼬마들과 인나랑 같이 물을 길어 나르던 기억은 내가 러시아에 있었던 기간을 통틀어 가장 남기고 싶은 명장면이있다면 바로 이 날의 기억이 아니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