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집들이 마주 보고 있는 사샤의 집 건너편에 워와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고모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웃으로 지낸 터라 양쪽의 집안 사정을 훤히 깨고 있을 정도로 허물이 없는 사이였다. 두 집다 문은 항상 열려 있어 각자의 사생활은 아랑곳 안 하고 들락날락하는 막역한 사이이기도 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소리를 듣고, 사샤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술이 떡이 돼서 인사차 들른, 워와의 첫인상은 장난기 머금은 똥그란 눈에, 머리는 이미 거의 다 벗겨져 이마가 반질반질한 , 전형적인 술꾼인 러시아 남자의 표본이었다.
그 뒤를 말없이 러시아 시골 아낙의 순박한 모습을 한 중년의 나타샤 아줌마가 먹을 것을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부부였다.
우리가 대화하는 와중에도 말없이 남의 말을 들으며 웃기만 하는 그녀는 순박함 그 자체였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말 없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항상 온화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첫날부터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가와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이웃이 되었다.
러시아식 겨울나기
버스를 타고 학교가 끝나고 나면, 인나와 러시아어 공부를 하기 위해 들리는 길에 항상 워와네 집에 눈길이 갔다. 갈 때마다 집 앞에 집을 지을 때나 볼 수 있는, 통나무 목재들이 눈에 띄게 하나씩 하나씩 늘어나 있었다.
워와가 밤마다 하나씩 훔쳐다 놓은 거였다.ㅎㅎ
워와 아저씨는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나무를 운반하는 운전수였다. 가끔 통나무를 싫은 큰 트럭이 집 앞에 서 있을 때가 있었던 거보니 나무를 실어다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 나무를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저렇게 하나씩 하나씩 가져다 놓냐고 물어보니 , 반야를 짓고 있다고 한다.
반야는 러시아식 전통 사우나다. 통나무로 지어진 내부에 난로를 들여놓고, 마른 참나무 가지 잎으로 몸을 때려주면서, 난로 안이 뜨겁게 달구어 지면 물을 부어 증기를 내게 해 주면서 사우나를 하는 방식이다. 그러고 나서 몸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지면 , 바로 밖으로 뛰쳐나와 그 시베리아의 매서운 눈 속에 맨몸으로 뒹구는 러시아식 겨울나기를 하는 것이다.
반야는 워와 아저씨 혼자 직접 지었기 때문에, 내가 그 사우나를 사용할 수 있을 때 까지는 다음 해까지 기다려야 했다.
반야가 완성되었을 때 제대로 사우나를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 이전에 나는 꼴랴네 아파트에서 한 일주일에 두 번, 목욕을 하곤 했는데 , 이마저도 목욕 중에 물이 끊어지는 일이 부지기수라서 다급한 마음으로 재빨리 끝내야 했다. 연희 언니네 집도 사정은 비슷했다. 물 나온다고 목욕하러 오라 해서 , 가보면 물이 끊어져 있고...
워와네 바냐가 완성된 것은 무엇보다도 반가운 일이었다.
사우나에 불을 때기 시작하면 동네 행사가 되어버렸다. 나와 올야도 어릴 때 소풍 가는 기분처럼 들떠서, 우리 차례를 기다리곤 했다. 그 동네 사는 가쨔 언니네 식구도 모였다. 이 날 밤은 또 술파티가 이어지게 마련이다. 화려할 거 없는 이 단조로운 마을에 활기가 느껴지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제대로 된 그들의 생활방식인 러시아식의 문화에 빠져들었다. 머나먼 이방인의 도시에서 온 내가 기폭제가 된 것도 있었다.
워와는 아직 8살도 되지 않은 막내아들 다니엘을 팬티만 남겨놓고 사우나 중간에 데리고 나가 눈 속에 던져버린다.ㅎㅎ눈 속에서 한 5분 정도 뒹굴다가 다시 반야로 들어가 몸을 녹인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 추위를 이겨내면서, 그 척박한 환경의 삶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유 있는 술꾼
워와는 술을 마시면 코가 빨개질 정도로 술꾼이었지만, 코가 빨개지면서 눈시울도 같이 붉어졌다.
워와와 나타샤는 3형제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아들은 세르게이와 다니엘 밖에 없었다. 한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워와 부부의 큰 슬픔은 바로 아들의 죽음이었다.
집 앞에 놀던 아이가 아버지의 큰 트럭을 보자마자 반가워서 달려가다 , 후진하는 워와 차에 부딪혀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자신의 차로... 워와는 술을 먹을 때마다 아이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자기가 죽인 거라고.....
통나무를 실은 트럭은 뒤에 따라오는 자신의 아들을 보기에는 너무나 큰 차였다. 그 뒤로 나타샤는 말이 없어지고, 그 사람 좋은 순박한 얼굴에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졌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타인의 슬픔 앞에서 나는 그 슬픔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솔직히 실감 나지 않았다.
워와네 식구와 우리 사촌들과 고모네 산소를 방문하기 위해 그곳의 공동묘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러시아 무덤은 공동묘지라는 느낌보다는, 이 곳의 피크닉 에어리어처럼 앉아서 쉴 수 있게, 가족들이 와서 편하게 고인의 살아생전의 추억을 더듬으며, 담소하다 가는 그런 기분 좋은 분위기의 묘였다.
고모를 방문하고 나서 워와의 아들을 보러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작은 비석안에 새겨진 사진 속의 아이....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잠시머물렀다는 증거가 된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나타샤, 아무런 표정 없이, 말 한마디 없이 , 그저 아이의 사진만 쓰다듬는다.
살아 있을 때 아들이 좋아했던 음식을 내려놓고 , 살짝살짝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워와 아저씨의 슬픔보다 더 가슴에 박혔던 순간이었다.
세상의 부모는 자식의 죽음 앞에 다 같은 슬픔을 갖고 있었다. 단지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슬픔의 무게는 같을 거라 생각했다. 그 슬픔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 가늠을 못 할 뿐...
따뜻한 시선
부부가 둘 다 부지런해서 항상 몸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워와네 집은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는 땅이 그리 크지를 않아서, 주말이면 교외에 따로 마련한 곳에 다차를 가지고 있었다. 각종 유실수들이 즐비한 그곳에 갈 때마다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아무르 강가에서 잡아온 연어를 훈제할 때도, 우리를 불러서 그 속의 알을 빼내어 빵 위에 얹어서 내주고 , 쓸만한 모든 식재료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저장식품으로 만들어 놓는데, 가장 인상에 깊었던 음식은 가지를 볶아 염장 처리한 것과 능금 같은 작은 과일을 따다, 설탕에 재어서 통조림을 만드는 캄포트라는 저장음식을 만들어 내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서로에 대한 이해관계나 계산이 보이지 않았던 그들 ,,...
그들이 가진 만큼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면을 찾아내려는 나의 단편적이고 편협한 생각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부부는 내게 너무 따뜻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이웃이었다.
이념이 다른 러시아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 사람들이었다.
문화와 생활방식은 달랐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감정은 우리와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러시아 문화를 직접 체험하게 해 주고, 그 과정에서 한없이 나의 시선으로 동참해 주었던, 그날들의 하루하루를 잊지 못하게 해 주었다.
자칫 어색함과 이질감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는 나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준 그들은, 나의 가슴에 온기 가득한 불씨로 남아 아직도 살아있다.
그들이 나에게 보내 준 그 온기의 불씨가, 언젠간 다른 누군가에게 옮겨가 나도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