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에서 김장을 하다

인간의 본능인 식에 충실하다

by kseniya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에서 먹는 것이 가장 치열하게 느껴지던 시기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이 곳에서도 그 당시에 빈부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같은 동네에서도 음식의 걱정 없이 풍요롭게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인 그들에게까지 풍요로움이 전달되지는 않았다.


같은 형제들 중에서도 올야 언니네 창고는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각종 밀가루를 비롯해 필요한 공산품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같은 사촌인 사샤나 가짜 언니네에서는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 몇 군데의 마가진( 상점)을 돌아 4시간 만에 겨우 한 끼의 초라한 식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흔한 냉장고도 올야네 집에만 있었다. 물론 물건들이 들어오면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지만, 온 식구를 걷어 먹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각자도생의 시대인 것이다.

러시아 서민들의 식문화


러시아의 모든 상점은 공산주의 시절, 식료품들을 배급받던 그 상태로 여전히 남아 있어서 품목별로 분리가 되어 있었다. 빵가게 따로, 생선가게 따로 , 육류 가게 따로...

그 마저도 동네의 가게들은 없는 물건들이 더 많아서 가게 안의 모습은 휑하다 못해 초라했다. 상점이라고 해 봤자 먹고 싶은 것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 그 날 상점에 들어와 있는 거에 따라 집어오는 게 맞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듯한 빵은 러시아 사람들의 주식이었는데 흰 빵과 흑빵이 있었다. 호밀을 발효시켜 만든, 시큼한 맛이 나는 딱딱하게 굳은 네모난 식빵 같은 흑빵은, 그 시기에 한국의 진로소주 연구팀에서 이 빵에 대해 연구하러 직접 연구원들이 들어오게 만들 정도로, 한국까지 알려진 건강에 좋은 빵이었다. 러시아말로 검은색의 빵이라는 뜻의 이 빵은 러시아 밥상에 매일 올라오는 주식이었다.

주로 이크라라는 연어알을 얹어 먹거나, 가끔 상점의 철갑상어 알인 캐비어가 나올 때도 아주 가끔 있었다. 여기에 정어리라고 등 푸른 생선을 소금에 절인 통조림 식품과 같이 먹기도 했다.

우유의 지방으로 발효시켜 만든 사워크림 같은 스메타나를 발라서 먹기도 했는데. 올야의 말로는 샤워크림 격인 스메따나 역시 몸에 엄청 좋다고 했다.

어느 음식이든 약방의 감초같이 들어가는 일종의 소스 같은 역할을 했다. 심지어는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수프인 토마토와 비트를 넣고 끓이는 보르쉬에도 스메따나가 들어간다.

좀 더 여유로운 사람들은 러시아산 자연 소시지 칼바싸를 썰어 빵과 같이 곁들여 먹는 경우도 있었다.


이 모든 음식을 올야네 식탁에서 다 경험한 것이다. 올야는 음식 솜씨도 좋아서 중국에서 가지고 온 식재료들로 다양한 음식을 해 주었는데, 그중에 감자를 쪄서 쫀득쫀득한 감자떡을 만들어 앞뒤 노릇하게 구워준 맛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 돌아와서 기억을 더듬어 만들어 보았지만, 역시나 실패한 음식 중에 하나다.


일반 사람들은 몸을 직접 움직여, 집에서 주로 만든 음식이 차지하는 비율이 큰 것을 보면, 이 나라도 역시 몸을 움직여 부지런히 노동하는 사람들만이 넉넉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러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자연적인 음식들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맛도 좋았다.


러시아 다차 문화

시베리아의 9월의 날씨는 한국의 늦여름과 비슷하게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고 , 낮에는 아직까지 햇빛이 따사로워 더운 기운을 느낄 정도의 익숙한 날씨였다. 짧은 봄과 긴 겨울을 가지고 있는 일 년 중 반이 눈이 쌇여 있는 곳이다. 겨울 내내 쌇여 있던 눈이 , 4월이 되면 녹기 시작하면서 눈이 거의 다 녹아갈 무렵, 바로 여름이 시작된다.

그 짧은 수확기간을 이용하여 가능한 한 겨울의 먹을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서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눈이 녹자마자 땅을 갈아서 농작물을 심을 수 있게 준비를 한 다음, 집안에서 키우던 모종을 밭에 옮겨 심는다. 그러면 겨울이 오기 전에, 밭을 차지하고 있던 농작물을 수확해 겨울에 먹을거리로 비축을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다차는 개인 주택에 텃밭이라고 하기엔 어마어마한 땅이 뒤에 딸려 있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 다 되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 올야 언니네 갔을 때도 낮에는 거의 풀을 뽑거나 잡초를 뽑고 , 농작물을 수확해 여름에는 그 날 그 날 싱싱하게 뽑아 먹고, 배추나 양배추 같은 것은 겨울이 되기 전에 파서 김장을 하거나, 김치 종류로 저장을 해서 겨울 내내 먹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였다.

여기에 산이나 들에서 따온 고사리 종류 같은 것을 삶아서 말린 다음 저장 식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모든 것이 원시적인 노동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냥 작은 텃밭을 일구는 정도 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기본적인 식생활을 좌우하고 있었다.


올야네 밭을 정리할 때는, 다른 식구까지 모여서 빠르게 정리를 하고 나면, 그다음 날은 다른 집으로 옮겨, 서로서로 도와가며 일상의 노동을 교환했다. 나도 여기에 동참했는데, 사실 나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기는 했다.

잡초 하나 뽑는데도 좀이 쑤시고, 그 큰 밭을 쳐다보면 한숨만 나왔다. 이렇듯 주말에 하루 종일 땡볕에 일을 하고 나면 온 몸에 땀과 기운이 빠진다. 동네마다 맥주 차가 우리나라의 정화조 같은 곳에 맥주를 담아 팔러 다니면, 빈 병을 가지고 맥주를 사 가지고 와서 , 한 사발 들이마시면 , 땀 흘리고 난 후의 그 시원함이란 잊을 수 없는 맛이다. 흑맥주 비슷하게 진한 보리차 같은 맥주는, 홉이 잔뜩 들어간 맛이 나고 알코올 도수도 높아 처음 에는 뭣도 모르고 덜컥 덜컥 마시다가 , 잠시 후 취기가 오르면 얼굴이 달달하게 빨개지곤 한다.

드디어 김장을 하다

한 집의 밭에서 나오는 야채나 곡물들의 양은 실로 엄청났다.

그들의 주식인 감자를 비롯해 , 겨울 내내 저장식 통조림으로 만들어 놓는 , 대표적인 러시아 저장음식인 양배추피클을 비롯해서 , 필요한 모든 농산물이 여기로부터 나왔다.

한인들의 다차에서는 한국식 배추도 심어졌는데, 다 자란 배추는 우리가 생각하는 속이 꽉 찬 그런 배추가 아니라 머리가 듬성듬성 빠진 아저씨의 머릿속 같았다.

올야네는 딸을 비롯해 도와줄 사람들이 많았지만 , 사샤네 집은 인나만이 유일한 노동력이라서, 나는 가끔 그 집에서 음식 하는 것을 도와주곤 했다.


밭의 모든 수확물이 걷어지고 추위가 서서히 다가올 무렵. 그 밭에서 나온 배추를 가지고 드디어 김장을 하는 날이다. 100포기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양으로 치면 한 30포기 정도 될까?

서울서 온 조그마한 아가씨가 주방장이 돼서 이 모든 일처리를 진두지휘한다.

원래 음식 만드는 건 겁이 없어 생긴 거와 다르게 척척 잘 해내는 일중의 하나라 그렇게 겁이 나지도 않았다.

문제는 재료의 문제였다. 있는 거라곤 고춧가루와 마늘이 다였다.

그래도 배추를 씻고 소금으로 절인 다음 , 있는 재료로 최대한 넣을 수 있는 걸 넣고 만들기 시작했다.


인나는 적적하던 자신의 집에 내가 오는 날이면 신이 나 죽겠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오는 날은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을 맛볼 수가 았기도 하고, 하루 종일 아무도 없이 적적하다가 내가 가면, 그나마 인나는 모처럼 수다도 떨고 활기를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시키는 일들을 옆에서 들뜬 마음으로 발 빠르게 잘도 도와준다.

김치가 완성되고 나면 이 김치들은 지하 방공호 같이 생긴 기다란 동굴 같은 곳으로 옮겨진다.

그 안은 정말이지 별세계였다.

모든 집안에 이런 구조의 지하가 있었는데, 마룻바닥에 조그마한 네모난 입구를 열고 내려가면 지하 반공호 같은 길이 있다. 그 안에 온갖 병으로 만들어진 저장식품들이 일렬로 줄이 서있다. 신기한 경험들이다.

김장을 끝내고 나면 월동준비는 끝이 난다. 이제 6개월을 눈과 함께 동면하는 것이다. 지하실의 음식들을 하나하나 축내면서......

워와 아저씨와 돼지고기


김장이 끝나고 나니, 사샤의 옆집에 사는 이웃인 워와 아저씨가 세숫대야 같은 데다 바로 잡은듯한 돼지고기를 한가득 가지고 온다. 어제까지만 해도 돼지우리에 살아있던 돼지를 잡은 것이다.

워와 아저씨는 겨울에 필요한 고기를 얻기 위해서, 집에다 돼지우리를 쳐 놓고 돼지를 키웠는데, 비게가 최대한 많이 생기도록 돼지가 움직이지 못하게, 돼지우리를 아주 협소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돼지는 갈 때마다, 움직이도 못하고 누워있으면서 계속 몸집만 늘어갔었다. 그 돼지가 없어진 것이다.

그 돼지고기를 김장김치와 함께 기름을 넣고 볶다가 고추장으로 마무리를 하면, 이제 것 먹어보지 못한 훌륭한 돼지 복음 요리가 되었다.

그 맛이 하도 그리워 한국에 돌아와서, 가끔 얇은 돼지고기와 김치를 넣고 볶아보니 그 맛이 전혀 나질 않는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재료나 양념은 훨씬 훌륭한데, 왜 그 맛이 나질 않는지를....


나는 지금 먹거리의 천국인 미국에 살고 있지만, 러시아에서 살던 그 시절의 맛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그리운 맛이라 사실 이 곳에서도 무늬만 한국음식이지, 그다지 맛의 본연의 맛은 느끼지 못하고 산다.

먹거리가 넘쳐나다 못해 흘러넘치는 이 곳에서 살다 보면, 그 당시의 러시아와 비교가 되면서 씁쓸한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풍요를 넘어 남아 버려지는 것들과 부족함을 넘어 굶주림의 최악의 상황에서 , 그날의 빵을 얻기 위해 자신의 피를 팔아야 했던 , 모스크바의 어느 거리의 군인의 처량한 눈빛이 오버랩되면서,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 무렵 인나 집에 갈 때마다 워와 아저씨랑 마주쳤는데, 그는 항상 내 이름을 러시아 이름을 부르지 않고 , 항상 한국 이름인 내 원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내 이름은 똑같은 받침이 들어가기 때문에 , 외국인들에게는 다소 발음하기가 어려운데도, 꼭 내 한국 이름을 불렀다,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니 , 너의 고유한 이름을 내버려 두고, 왜 굳이 남의 이름을 쓰냐고 내가 한국을 나갈 때까지, 나의 한국 이름으로 나를 불러줬다.


워와 아저씨는 정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정이 많고 다정한 이웃이었다.

한 번씩 나를 정식으로 초대를 하면,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이것저것 다 내어놓는다. 그것도 모자라 먹다 보면, 끝없이 지하실을 들락날락하면서 갖은 음식들을 가지고 나왔다.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 말로만 듣던 시베리아의 겨울에, 영하 38도가 넘는 그 매서운 추위에, 나의 콩팥에 문제가 생겨, 양쪽 허리에 무거운 돌을 달고 다니는 것처럼 아픈 적이 있었다.

그때, 워와 아저씨가 자기네 집에 초대를 해서, 러시아식 비계인 살라를 내어놓고 먹으라 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는 살라를 먹어 줘야 이 시베리아의 겨울을 날 수 있다고 하였다.

소금에 절인 100프로 돼지 비계인 살라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슬라브 민족의 대부분이, 전통적으로 먹는 음식이라 아주 귀한 대접을 받는 음식이다. 러시아 술 보드카를 마실 때 곁들여져 나오는 음식이기도 했다.


워와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다시 다루어야 할 것 같다. 내 소중한 아저씨 워와와 그의 아내 나타샤 아줌마가 많이 그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