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서 대학을 다니다 유학생으로 만나 샌프란시스코 근처인 산호세에서 신혼생활을 하다, 직장으로 인해 이 곳에 오게 된 예준네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신들의 일인 양 말없이 나서는 젊은 부부들은 그 험악한 멕시코에서도 자신들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그들에게도 멕시코는 무료하고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수더분한 예준 엄마도 그 예정된 1년이란 기간 동안에도 무척이나 힘들어했었다.
초점 풀린듯한 눈으로 항상 나의 집에 눌러앉아 이 넋두리 저 넋두리하며 시간을 보내다 남편이 올 시간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갓 돌 지난 예준이 하나만을 돌보며 저녁에 돌아오는 남편이 있었음에도 그녀의 멕시코 생활은 무료해 보였고, 이 곳에 대한 애착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 1년이란 기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것 같았다. 이렇듯 멕시코에 머무른 사람들의 사연은 제각각이었다.
멕시코!
그전까지 나에게 멕시코는 그저 미인대회가 열리면 순위 안에는 항상 들던 미인의 나라이자, 서부영화에서나 나오는 콧수염 달린 남자가 밀짚모자를 쓰고 망토 같은 판초를 두르고 있는 것 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 나라였다.
이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을 가지고 있는 나라인지, 얼마나 위험한 나라인지, 나에게는 관심 밖의 세계였다.
그런 멕시코에서 나는 5년이란 시간을 살며, 두 아이를 이 낯선 나라의 국민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이 무지함이 그 어마 무시한 세월을 견디게 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듯 발을 들여놓은 나라에 믿을 사람이라고는 남편밖에 없었지만, 그 남편마저도 일주일에 고작 주말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남편 없이 아이 둘과 함께 싱글 아닌 싱글로 살아야 했던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와 준 예준에 부부!
낯선 나에게 멕시코에서 살아가는 법을 알려 주고, 때로는 나의 우울감을 덜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던 이웃이기도 했다.
허물없이 이 집 저 집을 드나들면서 나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예준 아빠는 나의 상황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티후아나에는 대기업들의 공장들과 그 기업과 협력하는 한국업체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회사에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제한적인 미국 비자가 발급이 되었다. 그 비자로 주말이 되면 장을 보거나 미국 국경을 넘어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명색이 남편이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남편을 제외한 나와 아이들은 미국에 한 발자국도 갈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우유부단했던 남편으로 인해 가족들이 고생을 한다고 생각했던 예준 아빠는 속상한 나머지 농담 반인지 진담 반인지 모르겠으나 차라리 나보고 이혼을 하시는 게 낮지 않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 없이 혼자 갓난쟁이 둘을 돌보면서 동분서주하는 나를 보며, 언제 미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남편의 우유부단함에 남자로서 무책임함에 대한 비난이었을 것이다.
예정되어 있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상황도 쉽지 않은 무료한 시간들이었기에 기약이 없는 나의 상황이 더욱 안타까웠던 것이다.
시간은 차곡차곡 흘러갔고 예준네가 떠나는 시간도 덩달아 다가왔다.
예준이 엄마의 얼굴에는 서서히 희망과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고 ,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활기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드디어 이 곳을 벗어난다는 생각이 얼굴에까지 나타날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이사라고 해봤자 국경을 넘자마자 나타나는 가장 가까운 곳인 출라 비스타이지였지만, 엄연히 그곳은 미국이고 전혀 다른 세계임에는 말해 무얼 할까 싶다.
대부분의 주재원들은 남편은 멕시코로 아침마다 국경을 넘나들며 회사를 다녔다. 그들의 가족들은 출라 비스타에 집을 얻어 미국 생활을 하는 형식이 되었다.
예준네가 이사를 가고 나자 아파트 단지는 마치 텅 빈 거대한 동굴같이 허전했다.
이제껏 매일 드나들던 사람들이 없어지자. 나는 또다시 혼자의 생활이 되었다.
아이들이 어려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기도 힘들었지만, 그나마 예준네와 같이 다니던 교회 식구들을 종종 만나는 걸로 대신하곤 하던 날이었다.
미국으로 이사 간 예준네와 간간히 통화를 하곤 했지만,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예준네도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미국을 가고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일부러 미국에서 위험한 멕시코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나라도 당연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예준네는 때마다 우리 집 가족 행사가 있을 때마다 멕시코로 넘어와 우리 집을 방문하곤 했다.
어느 날 예준 엄마가 둘째를 가졌다고 하면서 내가 해 주던 양념통닭이 너무 먹고 싶다고 멕시코에 가면 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4년 만에 둘째를 가진 예준 엄마는 표가 나게 배가 나온 임산부의 모습으로 우리 집에 나타났다. 마치 친정을 찾아온 사람처럼 편안하게 내가 해 준 음식을 먹고 돌아갔다.
이 위험한 곳에 우리들을 방문하기 위해 찾아온 그 친구가 나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날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장을 봐와 임신 중인 예준 엄마를 위해서 음식을 했지만, 피곤한 줄도 모르고 쉴 새 없이 음식을 내왔다.
오히려 임신 중인 예준 엄마보다 같이 온 예준 아빠의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많이 굶었구나 ㅎㅎㅎㅎ
예준 엄마는 요리가 가장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친구였다.
이렇게 멕시코를 떠나 간 사람들이 수시로 바뀌는 걸 보면서 나는 한 해 한 해를 견뎌야 했다.
남겨진 우리들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떠나는 사람들은 수시로 바뀌어 갔다.
저마다의 다른 사연을 가지고 들어와서, 같은 이유로 이 곳을 떠나가는 것이었다.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희망찬 뒷모습과는 다르게, 나는 텅 빈 가슴속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허탈감과 외로움이 뒤엉켜 보이지 않는 슬픔으로 그 동굴 같은 내 가슴속을 채워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