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다짐하는 시기가 왔다.
2021년 잘한 일을 꼽아보니 커피를 배우고, 자격증을 따고, 바리스타로 제2의 인생을 개막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올해 초 YWCA 강좌를 통해 커피 강의를 등록하고, 두 달간 열심히 배워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다. 운이 좋게도 참 좋은 커피선생을 만났다.
첫인상은 순수하고 앳된 청년이었는데, 알고 보니 두 딸을 둔 가장이자 비교적 큰 규모의 카페를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바리스타 마스터이자 커피품평 전문가로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커피 관련 자격증이 수두룩했고, 국내 챔피언십은 물론 월드 챔피언십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동남아나 남미 쪽 커피농장의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프로필보다 내 마음을 끈 것은 언제나 단정한 차림새와 온화하고 다정한 말투, 순진하고 평온해 보이는 미소, 커피마스터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진심 어린 애정이었다.
20여 년간 회사생활을 하며, 회사 직함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들의 비굴함이나, 닳고 닳은 영악함으로 무장한 인간들의 잔머리 굴리기를 거의 매일 봐야 했던 나로서는 커피선생의 그런 모습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좋은 선생을 만났으니 열심히 배웠고, 종강할 때는 클래스 1등으로 성적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받아보는 상장이어서 그랬는지 ‘그게 뭐라고’ 꽤나 신나고 기분이 들떠 한동안 주변에 자랑질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6개월 후 나는 발달장애인들의 커피선생이 됐다.
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발달장애인들이 바리스타로 일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봉사를 하게 된 것이다.
몸은 성인이나 정신연령은 6-7세인 발달장애인, 얼핏 보기에는 정상인과 큰 차이가 없으나, 다시 돌아보면 십중팔구는 얼굴과 몸, 말에서 외형적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한 친구는 발음이 부정확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끊임없이 동료, 손님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처음엔 나도 말귀를 알아듣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대충 눈치로 파악한다. 바지허리가 엉치까지 흘러내려도 모르길 다반사, 그때마다 옷매무새를 고쳐주면 매번 "감사합니다 선생님" 인사를 잊지 않는다.
밀크스팀이 서툴러 가르쳐주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행주를 냅다 집어던지던 친구는 현재 나를 제일 따르는 애제자가 됐다. 카페에 오자마자 "오늘은 뭐가 맛있어요?" 하며 선생님이 직접 음료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한다. 나는 그날의 날씨, 하늘과 공기의 느낌, 그리고 내 기분 상태에 따라 라떼나 에이드, 블루베리 셰이크, 자몽차 등을 돌아가며 추천해주는데, 그 친구는 매일 "선생님이 해주신 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내가 태어나서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있어요"라는 말로 화답해준다. 별 뜻 없이 뱉은 접대용 멘트일지라도 마음 훈훈해지고 감사하지 아니한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 눈에 띄게 예쁘고 치장도 잘하는 친구가 어느 날은 향수를 들이붓고 왔길래 "바리스타에게선 커피 향기가 나야지 향수 냄새가 나선 안 된다"고 나무랐는데, 삐지거나 짜증 내는 대신 말간 얼굴로 열심히 제 할 일을 하는 친구를 봤을 땐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매일 두어 시간 간격으로 카페 메뉴 전체를 열심히 핸드폰에 입력하는 친구도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걸 못하게 말릴 순 없다.
종일 카페 매장을 쉼 없이 왔다 갔다 하며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면서도 주문이 들어와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하면 번개처럼 달려와 나무랄 데 없는 커피 한잔을 만들어낸다.
겉보기에 장애인 같지도 않고, 수많은 날을 탈 없이 잘 지내던 친구도 어느 날은 머신 앞에 버티고 서서 기계처럼 끊임없이 에스프레소 샷을 내린다. 깜짝 놀라 "그만!"하고 자극을 주면 그때서야 번뜩 정신을 차리고 멈춘다. 그러고는 몇 분 동안 멍...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야 나와 눈맞춤을 한다.
부모님이 신경을 많이 쓰는 듯 매일 하얀 셔츠를 즐겨 입고 다녔던 친구는 어느 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셔츠 소매로 닦았다. 커피나 음료를 젓고 난 스푼, 특히 초코 소스를 젓고 난 스푼을 소매에 닦았을 때 그제서야 발견하고 야단을 쳤더니,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며 "옷에 닦으면 안 돼요" 한다. "엄마가 이렇게 이쁜 옷 입혀주셨는데 더럽혀서 혼나면 어떡해?" 하니 천연덕스럽게 "괜찮아요. 다음부터 안 그러면 돼요" 한다. 그러나 그 친구는 다음에도 내 눈을 피해 슬쩍슬쩍 소매를 더럽히곤 했다.
처음에 난 이 친구들에게 무언가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픈 의욕에 불탔다. 정확한 에스프레소 추출, 미세한 거품이 윤기 있게 빛나는 마이크로폼 스팀, 손님에 대한 매너... 그러다 어느 날 깨달았다. 그런 스킬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장애를 갖고 있지만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제 몫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매일매일 성실하게 출근하고 해야 할 일을 해내고 있다는 성취감,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나아졌고 매일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켜 주고 싶을 뿐이다.
단정하고 반듯한 바리스타의 이미지를 심어준 내 커피선생 덕분에 나는 커피에 흥미가 생기고 보람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타인에게 대단한 영향을 줄만한 처지는 안 되지만, 나와 함께한 발달장애인 친구들이 ‘2021년, 코로나 창궐로 운이 나쁘면 수시로 콧구멍을 쑤셔야 했던 재미없던 시절에, 우리를 웃게 해 주고 사랑해줬던 커피선생님이 있었다’라고 기억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