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의 마음을 솔깃하게 하는 단어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대학부설 영재원', 그리고 '교육청 영재원'이다.
12년 전, 나 역시 그 단어에 마음이 솔깃했다.
앞서 이야기 했던
학원 앞에 걸린 'OO 수학경시대회 대상 OO초 3학년 OOO' 배너를 봤던 날.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우리 애들을 그 학원에 보내고 있었다. 최상급반 레벨 테스트 통과, 대회 수상, 동네방네 공부 잘하는 아이들 엄마로 소문이 나는 상상까지.
하지만, 현실은....? 나는 남편을 이겨먹지를 못했고 우리 아이들은 집 식탁에서 교과서와 기본 문제집 몇 권을 사다 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지금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그게 우리 집 복리 인생 시작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학교에서 공문을 받았다.
'OO 대학교 부설 영재교육원 모집 안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고력 수학 학원은 못 보냈지만, 대학부설 영재원은 도전해 봐야지.
커리큘럼을 보니 마음이 더 설렜다. 학교에서 해보기 어려운 실험, 프로젝트 발표 수업. 그리고 지적 자극을 줄 친구까지.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준비해야 하는 서류가 제법 많았다.
부모 서술서, 두 아이의 포트폴리오,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 추천서까지. 초등 1학년, 3학년. 두 아이 서류를 동시에 준비하느라 퇴근 후 매일 밤 12시까지 컴퓨터 앞에서 공을 들였다.
서류 심사와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 이제 서약서만 제출하면 되는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출석률 70%? 80%(이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를 채워야 수료가 가능한데, 수업이 대부분 날씨 좋은 계절의 토요일이었다.
이건 내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 남편과 대화를 시작했다.
“1년 52주 중에 봄, 가을 날씨 좋은 주말이 몇 번이나 되겠어. 그런데 그날을 전부 영재원 수업에 참여하느라 우리가 여행도 못 간다고? 고작 초등 1, 3학년이야. 배워봤자 뭐 얼마나 대단한 걸 배우겠어.”
의외로 남편이 또 쎄게 나온다. 남편이 나의 공매 세력이란 걸 내가 한동안 깜빡했다.
이런.
남편의 반대가 오히려 오기를 불렀다.
“내가 서류 준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는 이렇게 얻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그날 밤, 우리는 평생 기억에 남을 부부싸움을 했다.
.
.
.
나는 또 남편을 못 이겼다.
(나는 그 서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고 포기하겠다는 이메일을 보냈었다)
나도 아이들의 엄마로서 적어도 50%의 권리가 있는데. 선택권이 나에게 없다는 생각과 내 마음을 몰라준다는 서운함. 서류 쓰면서 들였던 아내의 정성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남편의 지극한 T 성향. 나는 그날의 서운함이 두고두고 아이들 키우는 몇 년간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12년이 지난 지금,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초등 저학년 때는 주말마다 온 가족이 산으로 바다로 떠났던 그 시간이, 어쩌면 최고의 영재교육이었을지도.
물론 고학년이나 중학생 시기라면 영재원 경험이 진로에 도움이 되겠지만, 초등 1학년과 3학년에게는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을 대체할 만한 교육이 없었다.
남편 덕분에(?) 아이들은 날씨 좋은 토요일마다 자연 속에서 뛰놀며 배웠다.
물론 각 가정마다 답은 다르다.
나는 이걸 '균형'의 문제로 본다.
맞벌이에 외동이라면 주말 프로그램이 부모에게 숨통을 틔워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린 다섯 식구였고, 평일엔 함께할 시간이 부족했다. 영재원까지 왕복 2시간, 두 아이를 보내도 막내는 남아 가족이 흩어져야 했다. 무엇보다 남편은 카니발에 아이들 태우고 떠나는 주말여행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우리 집엔 맞지 않는 선택이었을 뿐, 영재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부부가 아이들 앞에서 싸워가며 시켜야 할 교육은 없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그날의 투자 교훈
수료증은 잃었지만, 함께한 계절은 졸업장보다 길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