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토박이가 믿어주려나...?

by 김연수


친정 작은엄마의 당부를 전해 듣고 나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연수 누나한테 꼭 애들 잘 키운 비법 듣고 와라."


대치동에서 30년을 사신 분이다. 그 지역 학원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고 계시고, 입시 정보라면 눈 감고도 줄줄 꿰시는 분이. 그런 분이 왜 하필 나한테서 육아 비법을 듣고 오라는 걸까? 궁금했다.




결혼식을 앞둔 사촌동생을 위해 사촌들끼리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다.


"누나. 엄마가 그러시던데, 꼭 누나한테 애들 잘 키운 비법을 듣고 오래요."


전화로도 했던 말을 또 한다. 작은엄마가 정말 여러 번 당부하셨던 것 같다.

사촌동생은 밥 먹다 말고, 메모라도 할 기세였다.


"진짜 궁금해? 가르쳐줄까?"

"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태연하게 말했다.


"있잖아... 밤 9시에 재워."


"......?"


동생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게 뭔 소리야, 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다였다.


꽤나 진지하게 내 대답을 기다렸던 동생의 얼굴이 살짝 갸우뚱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마 <원어민처럼 영어 잘하게 키우는 법>이나 <수학 선행 노하우> 같은 걸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대답은 초라할 만큼 평범했다.

그런데 나는 진심이었다.


9시 취침은 아이만 위한 규칙이 아니다. 부모에게 '매일 3시간'을 돌려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엄마가 성장하는 시간 180분

아이 셋을 9시에 재우면 9시부터 12시까지 온전히 방해받지 않는 세 시간이 확보된다. 나는 그 시간에 강의안을 만들고 논문을 썼다. 책도 썼다. 친정이나 시댁 도움 없이 삼 남매를 키우며 대학 강사로, 그리고 신설학과 전임교수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시간 덕분이었다. 학과장이 수업을 안 주면 바로 백수가 되는 신세에서, 이 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경력 단절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음과 고요 사이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황금 시간'이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육아를 버티게 해 준 나의 정신 건강이었다. 아이들이 깨어있을 때 시끌벅적하게 뭔가를 같이 하는 것과, 차분하게 정리된 집에서 아이들은 자고 어른들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우리 집엔 TV가 없었지만, 애들이 잠들면 남편과 미리 찜해뒀던 영화를 보거나, 한 주 지난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월요병을 달랬다. 애들을 재워놓고 둘만의 시간을 가질 때면, 우리는 다시 신혼부부가 됐다. 여전히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 같았다.





초대와 울타리

아이들의 취침 시간을 9시로 정해두니, 퇴근 후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은 고작 2~3시간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좋았다. '3시간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이 드니 화도 덜 났고, 매 순간 더 집중할 힘이 솟았다. 시간이 한정되니 덜 힘들게 느껴졌고, 긍정적인 시스템이 저절로 만들어졌다.


흔히들 아이를 낳으면 부부만의 시간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셋이 되도록 우리의 삶에 아이들을 '초대'한 느낌으로 살았다.


부모가 먼저 생활 리듬을 정해두고, 아이들이 그 안으로 들어와 적응하도록 도왔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끌려가는 게 아니라, 부부의 안정적인 울타리 안에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는 것. 그게 우리 육아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만든 큰 틀이 바로, 9시 취침이라는 기준이었다.



물론 현실적인 반론도 있다.

"우리 애는 안 자는데 어떻게 재워요?",

"우리 애는 저녁잠이 없어요"

많이 듣는 말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아이가 커피를 마시겠다고 하면 “안 돼”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잠은 왜 아이의 의지에 맡기는가.

수면은 타협의 영역이 아니라 생존의 기본 조건이다.

충분한 수면은 ‘통제’가 아니라 ‘보호’이자 '책임'이다.


아이가 스스로 버티는 힘보다, 부모가 지켜주는 리듬이 더 오래간다.

9시를 목표로 시스템을 만들어가면, 아이도 부모도 그 리듬에 맞춰진다. 중요한 건 완벽한 9시가 아니라, '부모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원칙이다.


나는 갸우뚱한 표정의 사촌 동생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일단 아이를 낳으면 너희 부부의 삶은 사라진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하지만 9시에 재우면, 아이들은 충분한 수면으로 튼튼하게 자라고, 너희는 너희의 결혼 생활을 되찾는 매일 밤 세 시간을 얻게 돼. 그 세 시간이 너희의 결혼 생활을 살리는 비법이고, 결국 그 안정적인 부모의 모습이 아이를 가장 잘 키우는 비결이 될 거야."


지친 부모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비법은 사실 아이에게 무언가를 더 해주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행복한 부모의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오늘의 투자 교훈: 9시 취침은 내 인생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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