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달러의 배신, 1.25의 난제
달러트리(Dollar Tree) 계산대 앞이었다.
앞사람 두 명이 물건을 들고 대화하는 걸 들었다.
"이거 다 사면 얼마지?"
그 순간, 내 머릿속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세 개면 3.75, 다섯 개면 6.25… 세금까지 치면 대충 7불 언저리네."
한국에서 자라며 외운 구구단이 자동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칠팔오십육, 구육오십사.
교실에서 틀리면 얼굴이 화끈거렸던 순간들이 사실은 평생의 훈련이었다.
예전 달러트리는 단순했다.
가게 이름이 말해주듯 모든 게 1달러였다.
다섯 개면 5불, 열 개면 10불.
계산기는커녕 머릿속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달라졌다.
1.25, 1.50, 1.75, 심지어 5불짜리까지 등장했다.
"Dollar Tree"라 쓰고 "Decimal Tree(소수점 나무)"라 읽는 곳이 됐다.
물건 고르는 재미 대신, 소수점 계산의 미로에 빠지는 느낌이다.
미국은 학교에서도 구구단을 외우게 하지 않는다.
"굳이 외울 필요 없어, Multiplication Table 보면 되지. 계산기 쓰면 되지."
이게 보편적인 태도다. 정답은 머릿속이 아니라 손바닥 위 스마트폰이 알려준다는 철학이다.
그러다 보니, 계산대 앞 풍경은 종종 소동극이 된다.
물론 이런 방식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구구단을 따로 외우지 않다 보니, 1.25 × 7 같은 단순 계산에서도 한국인보다 더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다. 세금까지 합치면 얼마냐며 허둥대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심지어 식당 영수증을 보면 아예 팁까지 계산해 적어준다.
"15% = $6.72, 18% = $8.06, 20% = $8.95, 22% = $9.85."
손님은 그냥 고르면 된다. 메뉴 고르듯, 팁도 고르는 셈이다.
미국식 '친절한 수학 서비스'의 전형이다.
이쯤 되니 문득 상상이 됐다.
달러트리 계산대 옆 벽에 이런 포스터가 붙어 있는 모습 말이다.
• 1.25 × 2 = 2.50
• 1.25 × 3 = 3.75
• 1.50 × 2 = 3.00
• 1.50 × 3 = 4.50
• 1.75 × 2 = 3.50
• 1.75 × 3 = 5.25
마치 '소수점 구구단 표'처럼 친절하게.
그러면 손님들은 더 이상 머리 아플 필요 없이, 눈으로 보고 "아, 다섯 개면 6.25네' 하고 안심할 수 있다.
달러트리가 진짜로 '소비자 친화형 학습관'이 되는 셈이다.
반면, 한국인은 구구단 CPU(Central Processing Unit -컴퓨터의 중앙 처리 장치, '두뇌'역할을 하는 부분)가 장착돼 있다.
물론 1.25 × 7 같은 소수점 문제는 구구단으로 바로 풀 수 없다.
그럼에도 구구단을 외운 경험은 뇌 속의 작은 근육을 길러줬다.
숫자를 다루는 감각, 암기력, 집중력.
그 힘이 계산대 앞에서 은근히 빛을 발한다.
달러트리에서 내가 산 건 물건 몇 개가 아니었다.
숫자 앞에서 당황하지 않는, 구구단을 외운 한국인의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미국 교육부도 구구단을 도입하라. 달러트리 계산대 앞에서 길을 잃은 수많은 미국인을 구하기 위해서."
오늘도 나는 구구단 덕에 소수점 미로와 팁 퍼센트의 숲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한 가지 씁쓸한 건 있다.
"모든 게 1달러!"라는 단순한 슬로건 덕에 달러트리는 오랫동안 미국 서민의 친구였다.
지갑 사정이 가벼워도, 이 가게 문만 열면 뭐든 마음 편히 집어 들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달러트리는 이름값을 못 한다.
"Dollar Tree"가 아니라 사실상 "Dollar-Something Tree."
균일가의 마법은 사라졌지만, 계산대 앞에서 나는 한 가지 확실히 깨달았다.
한국에서 배운 구구단, 이곳에서는 진짜 '생존 스킬'이라는 사실이다.
달러트리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구구단을 잊지 말자.
달러 트리의 진짜 인플레이션은 물가가 아니라 계산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