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 한 장이냐, 사랑 두 장이냐
저녁 무렵, 미국 식당은 무대 같다.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 "Refill, please!"(“여기 리필이요! “)라는 외침, 그리고 웨이터의 바쁜 발걸음이 리듬을 이룬다. 친구 두 명과 앉아 있던 우리 테이블에 웨이터가 다가와 묻는다.
"Would you like one check or three?"
("체크 하나로 드릴까요, 세 개로 드릴까요?")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한국 사람인 내게 이 질문은 여전히 어색하다. 한국에선 누군가 카드를 꺼내고, 나머지는 "다음에 내가 살게"라거나 카톡 송금으로 더치페이를 한다. 그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미국에선 계산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각자 내기'가 선택지로 떠오른다. 이 질문은 단순한 서비스 차원을 넘어, 서로의 자율과 배려가 담긴 문화의 숨결이다.
재밌는 건, 이 질문이 모든 테이블에 똑같이 던져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이트 중인 커플에게 웨이터는 좀처럼 "체크 두 장 드릴까요?"라고 묻지 않는다. 로맨틱한 눈빛과 속삭임을 깨지 않으려는 배려일까. 계산서 한 장으로 그들의 사랑을 조용히 지켜준다.
반면, 옆 테이블 친구들이 "Split it four ways!"(체크 네 개로 주세요.")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그들은 계산서를 갈라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커플 테이블은 여전히 한 장의 체크로, 사랑의 무게를 묵묵히 지탱한다.
미국 직장 동료 넷이 찾은 파스타 집에서의 저녁은 또 다른 장면이었다. 긴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해 "해피아워나 가서 한잔 하자!"며 시작된 저녁, 사무실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와인 한 모금과 파스타 한 접시에 녹여내고 싶었다.
테이블 위엔 와인 잔과 접시가 어지럽게 쌓여갔지만, 누구도 "내가 낼게"라고 선뜻 나서지 않았다. 속으론 다들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오늘은 누가 계산하지?’
그때 웨이터가 다가왔다.
“Do you guys need one check or four?”
(“체크 하나로 드릴까요, 네 개로 드릴까요?”)
찰나의 정적. 그리고 우리는 합창하듯 대답했다.
“Four, please!” (“네 개요!”)
계산서 네 장이 도착하자 모두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지갑 전쟁도, 눈치 싸움도 없는 깔끔한 마무리. 웨이터의 얼굴에 스친 "내가 잘 물어봤지?"라는 표정은 내 착각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만약 웨이터가 체크를 하나로 가져왔다면? 아마 누군가는 "오늘은 내가"라며 카드를 내밀었을 거다. 한국에선 그게 자연스럽다. 한 사람이 계산하고 "다음엔 네가"라고 웃으며 말하는 건 돈의 거래 이상이다. 그건 관계의 릴레이, '너와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약속이다.
미국과 한국의 계산서 문화는 관계의 온도를 재는 온도계 같다. 미국은 개인주의답게 돈 문제를 선명히 긋는다. 각자 내는 건 차갑지만 공정하다. 그 명확함은 관계를 가볍게 만든다.
반면 한국에선 계산서를 나누는 건 관계를 쪼개는 듯 느껴진다. 한 사람이 내고 "다음엔 네가"라고 하는 건 따뜻한 투자,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끈이다.
미국의 스플릿 문화는 편하다. 눈치 볼 필요 없고, 마음이 가볍다. 하지만 '내가 낼게'라는 제스처의 따뜻함은 사라진다.
한국식은 드라마다. 누가 먼저 카드를 꺼낼지, 그 순간에 관계의 깊이가 드러난다. 하지만 그 드라마엔 부담이 따라붙는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관계의 깊이를 느끼고 싶다면 한국식이, 부담을 덜고 싶다면 미국식이 답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미국 식당에서 데이트 중이라면, 웨이터가 "체크 몇 개 드릴까요?"라고 묻지 않는 게 다행이다. 그 질문이 로맨스의 거품을 꺼뜨릴지도 모르니까. 계산서의 무게가 사랑보다 무거워지는 순간, 테이블 위의 촛불도 어색하게 깜빡일 테니까.
식당을 나오며 생각한다. 계산서는 한 장은 종이가 아니라 우리가 관계를 맺는 방식, 서로를 대하는 온도라는 걸.
다음번엔 누가 카드를 꺼낼까? 아니면 또 한 번, "Four, please"라고 외칠까?
그건 또 다른 저녁의 이야기로 남겨두자.
계산서가 관계의 온도를 말해준다면, 웃음은 언제나 무료다. 다음 한잔은 여기서 어떠신가요?
(해피아워 문화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다면 아래 글에서 확인해 보세요)
https://brunch.co.kr/@susieyou7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