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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마실래요 vs 뭐 먹을래요

술이 먼저일까, 음식이 먼저일까

by Susie 방글이




퇴근 후, 동료들과 함께 바 겸 식당에 갔다.
문을 여는 순간, 낮은 조명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잔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저녁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테이블 위엔 감자튀김, 나쵸, 치킨 텐더, 그리고 각자 고른 술이 가지런히 놓였다.


맥주, 와인, 칵테일.


그 다채로운 잔들이 이곳의 '질서'를 말해주는 듯했다.


서로 다른 잔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고, 아무도 그 차이를 묻지 않는다.
미국의 식탁은 '같이'보다는 '각자'의 조합으로 완성된다.
누군가는 맥주 거품을 보며 웃고, 누군가는 칵테일 잔을 돌리며 천천히 말을 고른다.
그 사이에선, 침묵조차 하나의 리듬이 된다.


가끔은 동료가 시킨 칵테일이 내가 주문한 와인보다 더 맛있다.
"한 모금만?"하고 건넨 잔이 의도치 않은 문화 교환의 장이 된다.
결국 술은 섞이고, 대화는 부드러워진다.
다음 날 아침이 조금 힘들어지는 건, 늘 그렇듯 인생의 작은 페널티일 뿐이다.


이상하게 늘 남이 시킨 술이 더 맛있어 보인다.
아마도 우리는 늘, 자기 잔보다 남의 잔에 인생의 맛이 더 진하다고 믿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술은 주인공이 아니라, 대화의 배경음악이다.
음식이 무대라면, 술은 그 무대를 감싸는 조명.
조명이 다양할수록 무대는 더 풍성해진다.


미국의 식탁은 '존중'이라는 이름의 거리를 두며, 편안한 여백을 만든다.
술은 여가이자 쉼, 그리고 대화의 속도를 조절하는 완충제다.


술은 취향대로. 주문한 음식에 더 관심이 간다.


한국의 술상은 조금 다르다.

"한 잔 하자"는 제안뿐만 아니라, 마음을 여는 신호다.

소주엔 삼겹살, 막걸리에 파전, 맥주엔 치킨.

술이 중심이 되고, 음식은 그 리듬에 맞춰 춤을 춘다.


한국의 술상에서는 '따라주는 손'이 대화의 첫 문장이 된다.

그 손끝이 잔을 채우는 동시에 마음을 덮고, 짧은 순간 속에서 정이 흐른다.

누군가의 손이 먼저 움직이고, 그 손끝에서 관계의 온도가 결정된다.

술이 분위기를 만들고, 음식은 그 분위기를 오래 머물게 한다.

한 접시의 안주가 돌아가는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맛보고,

잔을 채우며 마음의 거리를 좁힌다.


그래서 한국의 초대는 이렇게 시작된다.

"뭐 마실래요?"

그 한마디가 그날의 안주를, 대화의 깊이를, 관계의 결을 결정한다.


반대로 미국의 초대는 "뭘 먹고 싶어?"로 시작된다.

음식이 중심이고, 술은 그날의 기분을 따라 조용히 곁들여진다.

미국의 술은 '거리의 미학', 한국의 술은 '온도의 미학'이다.


최근 젠슨 황 CEO가 한국에서 치맥을 즐겼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었다.
치맥은 이제 음식과 술을 넘어, 한국인의 마음과 문화를 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의 술상은 이렇게, 음식과 술을 통해 사람 사이의 온기를 나누는 문화로 확장되고 있다.


나는 두 문화를 오가며 배웠다.

미국의 술잔은 각자에게 맞춰져 있고, 한국의 술잔은 서로를 향해 기울어진다.

미국은 "당신의 취향을 존중하겠다"라고 말하고,

한국은 "당신과 같은 맛을 나누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집에 손님을 초대할 때면, 나는 먼저 그날의 술을 정한다.

와인을 연다면 치즈와 파스타가 자연스럽게 따라오고,

맥주를 택하면 치킨이나 감자튀김이 생각난다.

소주를 꺼내면 불판이 달궈지고,

위스키를 고르면 조명이 조금 더 낮아진다.


술이 먼저 결정되면, 음식은 그 뒤를 따라온다.

그건 단순한 식사 준비가 아니라, 대화를 위한 의식이다.

그날 열어둘 술의 뚜껑은 손님을 향한 인사이자, 대화의 첫 문장이다.


오늘의 대화는 어떤 잔에서 시작될까요.
치킨이 먹고 싶어 맥주를 열었을까, 맥주가 땡겨 치킨을 튀겼을까


그날, 바를 나서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술잔의 각도는 달라도, 결국 마음의 온도는 같은 곳을 향한다는 걸.


미국은 맛의 다양성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한국은 맛의 공감으로 사람을 품는다.


결국 술이든 음식이든, 그것은 사람을 잇는 또 다른 언어다.
한 잔의 온도, 한 모금의 거리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이'가 되어간다.


결국 인생도 그런 것 아닐까.
각자 다른 잔을 들고, 같은 온도를 나누는 일.


그래서일까, 언어는 달라도 잔을 부딪힐 땐 늘 같은 소리가 난다.


"짠."
그 짧은 한 음절에 담긴 건 술이 아니라 마음이다.


한국에선 "원샷!"이라고 외치고,
미국에선 "Bottoms up!"이라 말한다.
사실 '원샷'은 콩글리시지만, 그 안에 담긴 건 꽤 진심이다.
한 번에 털어 넣는 건 술이 아니라, 마음의 거리니까.


오늘도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다른 문화 속 같은 온도를 배워간다.

달콤한 와인 한 잔이면, 오늘 하루가 조금 더 길어도 괜찮다.


사람들은 각자의 잔을 들지만, 결국 같은 마음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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