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엔 없지만, 도넛은 있다
회사 탕비실에 도넛 박스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웬 도넛이에요?"
"아, 오늘이 National Donut Day래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달력에는 없는데, 책상 위엔 도넛이 등장하는 날이라니.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드물지 않다.
어느 날은 Pizza Day, 또 어느 날은 Ice Cream Day.
심지어 '멸치만 빼고 모든 토핑을 올린 피자 데이(National Pizza with Everything Except Anchovies Day)'까지 있다.
도대체 누가 멸치를 그렇게 미워했을까?
'바보 같은 질문 해도 되는 날 (Ask a Stupid Question Day)',
'왼손잡이의 날 (Left-Handers Day),
'지각해도 되는 날 (National Be Late for Something Day), 그리고
'해적처럼 말하는 날(National Talk Like a Pirate Day)'도 있다.
하다 하다 못해 1월 16일에는 'National Do Nothing Day',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날'까지 있다.
이날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날’'일까.
이쯤 되면, 하루하루가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그건 마치 매일 다른 간식을 뽑는 자판기 같고,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 상자 같다.
미국의 이런 '데이 문화'는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365일짜리 파티 초대장이다.
오늘은 도넛을 빌미로,
내일은 커피를 핑계로,
사람들을 모으고 웃게 만든다.
소비와 상업이 손잡고 말한다.
"그냥 지나치지 마, 오늘도 뭔가 축하해."
물론, 미국에도 역사적 의미가 큰 날이 있다.
독립기념일(7월 4일), 재향군인의 날, 메모리얼 데이처럼
국가와 자유, 희생을 기리는 날들이 그것이다.
다만 이런 날조차 퍼레이드와 바비큐, 불꽃놀이로
'즐기는 방식'이 한국의 삼일절, 광복절과는 다르다.
즉, 역사적 의미 위에 유머와 즐거움이 섞여 있는 셈이다.
그리고 오늘은 11월 11일, Veterans Day 다.
전쟁에 참전했던 모든 군인들을 기리는 날이다.
한국의 현충일(전사자를 추모하는 날)과는 조금 다르다.
살아서 복무를 마친 참전용사들에게도 감사와 존경을 전하는 날이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Veterans Day가 열리는 같은 날 —
미국 땅에서도 한국식 ‘데이’가 슬쩍 얼굴을 내민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바로 빼빼로 데이, 그리고 오늘이 그날이다.
11월 11일이면 누군가 막대과자를 건네며 말한다.
"이건 한국에서 온 달콤한 의식이야."
알고 보면, 한국 마케팅의 달콤한 덫에
미국 사람들까지 기꺼이 걸려든 셈이다.
게다가 이런 날엔 언제나 '보너스'가 붙는다.
커피 데이엔 Wawa에서 커피가 공짜로 쏟아지고,
도넛 데이엔 "하나 사면 하나 덤" 프로모션이 줄줄이 이어진다.
이쯤에서 문득 생각하게 된다.
기념일이라는 건 결국 한 사회의 놀이 방식 아닐까.
미국은 1년 365일을 잘게 나누어
각각의 날마다 작은 축제를 만들어놓았다.
그들은 '함께 웃는 법'을
유쾌하게 상업화하는 데 능숙하다.
반면 한국의 기념일 풍경은 조금 다르다.
한국의 '기념일'은 기억의 형태를 띤다.
삼일절, 광복절, 한글날처럼
국가의 역사와 정체성을 새겨둔 날들이 많다.
태극기가 펄럭이고, 귀성길 고속도로가 꽉 막히는 풍경—
그건 한국식 기념일의 전형이다.
물론 한국의 기념일이 언제나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빼빼로데이…
초콜릿과 과자 봉지가 '기억의 틀' 사이로 밀고 들어온다.
미국이 도넛 박스를 들고 온다면,
한국은 달콤한 막대과자 부대로 맞서는 셈이다.
이 차이는 결국, 각 나라가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에서 온다.
미국은 다민족 사회라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안전한 상징—즉, 음식—으로 기념일을 채운다.
피자나 도넛은 누구에게나 부담 없는 축제의 언어다.
반면 한국의 기념일에는 근현대사의 상흔이 묻어 있다.
그 위에 경제 성장과 상업 아이디어가 덧입혀졌다.
그래서 한국의 하루들은
무게와 달콤함이 공존하는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런 '하루의 축제들'은
그 사회의 자화상이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즐기며,
무엇을 잊고 싶은지를 보여준다.
미국은 하루를 축제로 바꾸며 현재를 즐기고,
한국은 무거운 기억 위에 설탕을 살짝 뿌리며 하루를 버틴다.
생각해 보면, 이런 황당한 날들이 단순한 농담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건 하루를 잠시 쉬게 만드는 유머의 마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날들은
한 사회의 성격과 유머,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엔 어김없이 묻는다.
"오늘, 당신은 어떤 날을 만들고 있나요?"
어쩌면 회사에 지각해서, 바보 같은 질문을 해적처럼 내뱉는 날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런 날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만든다.
불꽃 대신 삼겹살 연기로 하늘을 채운 그 여름밤처럼—오늘도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굽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