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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를 묻지 마세요

울거나, 춤추거나

by Susie 방글이





얼마 전, 오랜만에 TV 앞에 앉아 싱어게인을 봤다.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을 유난히 좋아한다.

특히 싱어게인은 이미 무대 경험이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보석인데 잠시 흙에 묻혀 있었던 목소리'를 다시 세상에 꺼내놓는 프로그램이다.


그날,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나는 저절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전유나의 '너를 사랑하고도' — 내 18번 곡이었다.


여기서 잠깐, 왜 우리는 '18번'이라고 할까?
사실 나는 오래도록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썼다.
옛 가부키 명문 가문이 자신들의 18개의 대표 공연을
자랑거리로 꼽아 '18번'이라 부른 데서 시작된 말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더 친근하게, '최애곡'이라는 표현으로 바뀌고 있다.

말 그대로, 오래 함께해 편안하고, 마이크만 잡으면 절로 미소가 번지는 곡.
'18번'이라는 단어가 주는 고전적 느낌 대신,
내 마음속 최애곡이라는 말이 훨씬 내 감정과 맞닿아 있다.


마이크만 잡으면 친구들이 “아, 수지 나간다” 하며 자리 잡던,
한 시절 내 목소리에 가장 잘 맞던 노래.


그런데 웃긴 장면이 벌어졌다.

심사위원들이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아, 이 곡!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야!"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 잠깐… 이거 내가 부르던 노래인데?

갑자기 화면과 함께 내 연식이 스치듯 지나갔다.

이쯤 되면, 내 나이?

(모니터 밝기를 살짝 낮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흘러가자

모든 머릿속 잡음들이 사라졌다.

한 줄의 가사가 그 시절을 끌어올리고,

음 하나가 내 가슴 구석의 먼지를 살짝 털어냈다.


그날 밤, 그 노래가

나를 다시 그 시절로 데려다 놓았다.

마치 조용히 문을 열어놓고

"여기 있었지?" 하고 다정히 불러주는 것처럼.

음악은 원래 그런 존재다.

말없이 마음의 불을 다시 켜는 존재.

그렇게 음악은 우리를 아주 쉽게 과거로 데려다 놓는다.


오늘의 무대는 우리 집 거실입니다. 볼륨을 높이면, 추억도 따라온다.


마이크는 울다가 웃을 확률 100%.


문득 생각했다.

음악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한국에서 음악은 감정을 배달해 주는 서비스다.
물론 어느 나라든 헤어짐과 관련된 노래는 많다.
하지만 한국은 유난히 많다.
특히 발라드라는 장르가 있어,
이별이 찾아오는 새벽이면 멜론 차트 상위권이
누군가의 사연을 대신 울어준다.
보고 싶다, 그 말조차 넣어두는 밤이면
발라드가 마음의 무게를 대신 매달고 흘러간다.
한국의 음악은 공감이라는 따뜻한 온도 속에서
우리의 부서진 마음을 다독인다.


하지만 미국에서 음악은

자기표현을 확장하는 스피커다.

삶이 힘겨울수록 볼륨을 키우고,

실패조차 비트 위에 올려

춤추며 넘기는 방식이다.

"떠났다고? 그래도 난 여전히 Fabulous!"

상처 위에 반짝이를 뿌리는 것,

음악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아이돌 무대를 보면 더욱 확실하다.

한국은 수십 명의 호흡이 하나로 맞춰지는 지점에서

연대와 울림이 터져 나온다.

공연장은 거대한 파도가 되고

수천 개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는 의식이 된다.


반면 미국 무대는 과감한 개성의 실험실이다.

차고에서 만든 음악도 자신만의 색이 선명하면

언제든 메인 스테이지를 흔들 수 있다.

무대는 '우리'를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를 선언하는 공간이다.


콘서트 문화 역시 사뭇 다르다.

한국 콘서트는 팬과 가수가

같은 문장, 같은 응원법으로 연결되는 자리다.

떼창은 하나의 언어가 되고

조용히 듣다가도 후렴에선

온 관객이 한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한다.

가수는 그것을 "에너지"라 부르고

팬은 그것을 "인생의 이유"라 부른다.


반면 미국 콘서트는

각자가 자신의 방식대로 즐기는 자유의 축제에 가깝다.

누군가는 춤추고, 누군가는 맥주 한 모금에 리듬을 맡기고,

누군가는 공연 내내 혼자 노래한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곳.

음악은 그곳에서 각자의 자유를 가장 크게 확장한다


노래방 역시 다르다.

한국의 노래방은 감정의 고해성사실.

눈물로 번진 목소리도 음악이 품어준다.

그곳에서는 마음이 먼저 노래가 된다.


반면 미국의 Karaoke Bar는

조명과 관객이 한꺼번에 나를 추켜세우는 무대다.

주저함을 내던지고, 나를 스스로 소개하는 시간.

음악은 그곳에서 나를 세상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지나가던 발걸음마저 잠시 멈추게 만드는 노래. 고단한 하루도 음악 앞에선 쉬어간다. (퀘벡, Quebec)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무대는, 길 위에 있다. 한 도시의 심장은, 음악이 두근거릴 때 뛴다.


캐나다 한복판에서 만난 도깨비 OST. 음악이 먼저 나를 한국으로 데려다준다.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필요로 한다.

한국은 공감을 통해 마음을 어루만지고,

미국은 표현을 통해 자신을 확장한다.

하지만 노래 한 곡이 누군가의 가슴에 박히고

같은 후렴에서 마음이 동시에 흔들릴 때—

우리는 알게 된다.


각자의 리듬으로 걸어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박자를 공유하며 살아간다.


울거나, 춤추거나.

삶은 매번 선택지를 주지만

우리는 결국 같은 답을 낸다.


오늘도 어디선가 누군가

헤드폰 너머로 조용히 살아 있다.

볼륨을 조금만 올리면

그 마음의 온도가 들릴 것이다.


음악은 묻는다.

지금 당신의 심장은 어느 음으로 뛰고 있나요?


음악에 취해, 거리 위에서 숨을 노래한다.


그리고 우리는,

노래로 대답한다.



퀘벡의 오후, 음악이 흐르면 누구든 관객이 된다. 돼지가 제일 신났다


어디에 계시던,

오늘은 추억 속 노래 한 곡과 함께,마음이 따뜻해지는 하루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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