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감독도 대본도 없는 드라마

매일 상영 중

by Susie 방글이


한국 드라마를 보면 늘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순간, 남자 주인공은 꼭 0.1초 전에 나타나 정확한 각도로 여자 주인공을 받아낸다.


넘어질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눈이 마주칠 듯 말 듯. 모든것이 계산된 듯 자연스럽고, 자연스러운 듯 계산되어 있는 장면이다. 이거야말로 K-드라마가 사랑하는 클리셰다.


하지만 내 현실은 그 클리셰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훨씬 소박하다.


며칠 전, 위 케비넷에 있는 그릇을 꺼내려고 의자 위에 올라서다 살짝 균형을 잃을 뻔했다. 드라마였다면 남주가 뒤에서 자연스럽게 다가와 나를 살포시 붙잡으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그 순간 배경음악에는 당연히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커지겠지.


두근— 두근— 두근—


하지만 현실 남편에게서 들린 건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손을 뻗는 순간, 내 옆에서 깊은 숨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하아…"


그리고 이어진 말은 아주 현실적이었다.


"가만있어봐… 또 왜 저기 올라가 있어?"


나를 부드럽게 받쳐주는 대신 의자를 더 안전한 방향으로 밀어주며 자세 교정까지 해주었다. 설렘은 없지만 안전 점검만큼은 확실했다.




마트에서 발이 걸려 휘청거릴 때도 드라마라면 남주가 팔을 잡아주며 따뜻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디 안 다쳤어?"


하지만 남편의 반응은 분석이 먼저였다.


"요 며칠 운동 안 갔더니 다리에 힘 빠졌네?"


설렘보다 피드백이 더 빠르고 정확하다.




비까지 오기 시작하는 날이면 K-드라마 속 남주는 여주를 위해 우산을 들고 비 한 방울도 닿지 않게 지켜주지만, 우리 남편은 하늘에서 방울 하나 떨어지는 순간 생활모드로 돌입한다.


"비 온다! 차고문 열어놨어?"


우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활 안정성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또 이상하게 든든하다.




몸이 안 좋아 열이 나기 시작한 순간도 마찬가지다. 드라마였다면 남주가 조용히 이마에 손을 얹으며 물었겠지.


"괜찮아? 약 사 올까? 아니 병원 갈까? “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이마에 손이 닿기도 전에 이미 체온계 수색전이 시작된다.


"체온계 어디에 놨지?"
"어제 비 오는데 싸돌아 다니더니..."


설렘 대신 분석, 로맨스 대신 생활 기술의 세계다.




긴 산책 중 유난히 힘들었던 날 내가 "나 힘들어… 못 가겠다"라고 말했다. 드라마였다면 남주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업어줄까?"


하지만 남편의 반응은 다르다. 말보다 주변에 벤치 있는지 살피느라 눈이 바쁘다.


"가만있어봐… 어 저기 벤치 있다. 잠깐 쉬었다 가자."


업혀 가는 대신 벤치에서 한참 쉬다 다시 걸어갔다. 이상하게 마음은 더 편안해졌다. 부부의 생활 리듬이라는 게 아마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업혀가진 못했지만… 사진은 건졌다. 벤치에서 충전 80% 완료. 사진은 100점 ㅎㅎ


드라마 같은 로맨스는 드물지만, 미국에서는 가끔 다른 장르의 드라마 같은 순간이 나타난다. 한 번은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에서였다. 결제하려고 카드를 내밀었더니 직원이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You're all set. The car in front of you paid for your order."
(“괜찮아요. 앞차가 손님 주문을 계산하셨어요.”)


앞차가 내가 주문한 음료 값을 이미 결제해 두고 조용히 사라진 것이었다.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한 채, 그저 선한 행동 하나만 남기고 떠난 사람.


내가 시켰는데 누가 계산해 준 커피. 미국판 따뜻한 스릴러—앞차는 조용히 사라지고, 따뜻함만 남았다.


또 한 번은 Wawa 편의점에서였다. 계산하려던 순간 캐셔가 내 손에 들고 있던 음료와 간식 몇 가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You're good. He already paid for yours."
(괜찮아요. 그분이 이미 손님 것까지 계산했어요.)


이번에도 앞사람이 아무 말 없이 내 것까지 계산해 놓고 사라졌다. 역시나 인사할 틈조차 없었다.


그 짧은 순간, 보상도 시선도 바라지 않는 작은 선의가 내게 다가왔다. K-드라마 남주가 극적으로 등장하는 장면보다 더 울림이 컸다.


그분이 혹시 좋은 일이 있어서 기분이 좋아서였을까, 아님 내가 조금 이뻐 보여서였을까? ㅎㅎ (희망사항 100%)

아니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였을지도. 이유야 어찌 됐든, 그 따뜻함 하나 덕분에 내 하루가 그날 산 블루베리 머핀만큼 달콤했다.


드라마는 없어도, 이런 일상의 기쁨이 있다. 이런 소소한 친절 덕분에 이 나라에서의 삶이 조금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 Wawa에서 또 벌어진 무대 없는 친절. 사람은 사라지고 따뜻함만 남은 곳.


드라마 속 장면들은 늘 명확하고 예쁘지만 현실의 장면들은 어설프고, 부족하고, 때로는 너무 현실적이다. 그런데도 그 어설픔들이 오히려 내 생활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우리 집엔 기적의 타이밍으로 등장하는 남주는 없지만, 오랫동안 거의 매일 내 옆에서 “가만있어봐”를 외치며 나를 챙기고 걱정해 주는 남편이 있다. 만약 이 이야기가 넷플릭스에 올라간다면 아마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잔잔하지만 묘하게 중독적인 생활 드라마.
심장 뛰는 로맨스보다 더 따뜻함은 계속된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주연은 화려한 남주나 여주가 아니라, 그냥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일 것이다.


다운타운 거리에서 팔짱을 꼭 낀 채 걸어가던 두 노부부의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딸이 그대로 사진에 담아왔다고 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흩어지지 않게, 이 순간을 살짝 병에 넣어 두었다.


사랑은 화려하지 않아도, 이렇게 조용한 일상 속에서 천천히 자란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마치 작은 유리병 속에 담긴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흩날릴 만큼 가벼운 존재지만, 누군가에게는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된다.
일상의 조각들이 이렇게 모여 우리의 이야기를 만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 나이를 묻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