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은 과거형, 삶은 미래형

맛은 남기고, 자리는 바꾼다

by Susie 방글이


추운 겨울이 되면, 나는 포장마차에서 뜨거운 어묵 국물을 한 모금씩 마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국물의 따뜻함과 짭조름한 맛이 몸과 혀에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 그 온도가 마음까지 스며드는 듯하다.


반대로 더운 날이면, 달콤하고 시원한 팥빙수가 먼저 떠오른다. 입은 늘 이런 익숙한 감각을 가장 먼저 찾는다. 설명하지 않아도 몸이 아는 맛, 이미 안전하다고 판명 난 기억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맛에는 늘 과거형의 확실함이 있다.


그런데 삶은 이상하게도 미래형을 요구한다. 우리는 종종 잘 알고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익숙한 동네와 손에 익은 일, 예측 가능한 하루를 두고 굳이 불편한 선택을 상상한다.


맛은 확인을 원하고, 환경은 확장을 원한다.

맛은 "이건 괜찮아"라는 신호를 기다리고, 환경은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등을 민다.


그래서 여행지에서는 낯선 풍경 속에서도 라면을 찾게 된다.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쯤 2주 정도 길게 로드트립을 떠나는데, 그때마다 컵라면이나 라면을 챙겨 간다. 단순히 편리해서가 아니다. 몸은 익숙한 맛을 찾고, 마음은 잠시라도 안정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익숙한 맛을 찾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한식당을 향해 걷는 동안, 같은 한식이라도 전혀 다른 장소와 공기 속에서 먹는 경험은 새로움을 준다. 익숙함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환경과 상황을 바꾸는 순간, 반복되는 맛은 더 이상 단조롭지 않다.


딸 집 부엌에서 만든 붕어빵. 맛은 흉내였고, 길거리에서 먹던 그 맛은 아니었지만, 그래서인지 더 천천히 식고 있었다.


막상 여행이 끝나, 다시 익숙한 맛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쉬운 이유는 여행이 끝나서가 아니라, 반복될 일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입은 집을 기억하고, 마음은 집 바깥을 가늠한다.


이 두 감각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해가 지날수록 조금씩 분명해졌다. 이미 충분히 해봤고, 어떻게 흘러갈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은 대신, 완전히 편안하지도 않다.


젊을 때의 변화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변화는 이미 형성된 나를 데리고 어디에 서 있을지를 고르는 일에 가깝다. 새로 쓰기보다 배치를 바꾸는 쪽에 더 가깝다.


변화는 크게 결심하지 않는다. 다만 반복이 어느 순간부터 숨을 막기 시작했다는 것을 조용히 인정하게 된다.


나는 매번 저녁을 먹고 나면 같은 산책길로 나선다. 이미 몸에 익숙한 길이고, 늘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그런데 어느 날, 해가 기울 무렵 벤치에 잠시 앉아 바람을 맞는 순간, 그 바람의 온도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낮 동안 데워졌던 공기가 식어가며 얇아지는 시간, 익숙한 풍경이 처음 보는 장면처럼 스쳐 갔다.


산책길 벤치. 익숙한 길도, 잠시 앉아 바람을 맞으면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런 풍경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늘 익숙한 곳만 가느라 놓치고 있던 작은 아름다움이었다.


이 자리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조금 좁아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익숙한 길도, 시선과 마음이 조금만 달라지면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어쩌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죽을 때까지 익숙한 맛은 끝내버리지 못할 걸 알고, 나이가 들수록, 해가 지날수록 남은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환경만큼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보고 싶은 게 아닐까.


그래서 요즘의 나는, 맛은 그대로 두고 환경만 조금 옮겨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입은 여전히 집에 익숙한데, 마음은 가끔 낯선 바람을 쐬고 싶어 한다. 삶은 그렇게 익숙함을 안고서, 조금 다른 풍경 속에서 스스로에게 슬쩍 허락을 내주는 일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때로는, 그 작은 허락만으로도 삶이 한결 가벼워진다는 걸 알게 된다. 매번 같은 길을 걷고, 익숙한 맛을 음미하면서도, 마음 한켠이 새로운 공기와 스치는 순간, 우리는 여전히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결국 같은 라면이라도 산 정상 위에서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익숙함은 그대로지만, 환경이 바뀌면 경험 전체가 달라진다. 삶도, 맛도, 조금 다른 시선과 공간 속에서 새로움을 얻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건 아마,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조용히 도착하는,

나이가 들수록, 해가 지날수록 알게 되는 작은 선물인지도 모른다.


멈춰 있는 배.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도착할, 삶의 작은 선물 같은 시간.


모든 익숙함과 작은 발견을 지나, 삶은 다시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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