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음역대로 살자
내가 즐겨보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싱어게인이다. 패자부활전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결과가 아닌 노래 자체에 마음을 뒀다.
누가 살아남을지보다, 그들이 무대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가 더 눈에 들어왔다. 이미 한 번 내려온 사람들이 다시 서는 자리라서였을까. 그들은 더 이상 증명하려 들지 않았다. 잘 보이기 위한 선곡 대신,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노래를 골라 무대에 올랐다.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요즘 유행하는 곡도 아니었고, 어떤 노래는 조금 투박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어떤 순간보다 그 사람이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한 번의 선택과 목소리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본선이 가능성과 전략의 자리였다면, 패자부활전은 확인의 시간에 가까웠다.
이미 한 번 숨이 찼던 사람들이라서인지, 목소리에는 불필요한 힘이 없었다. 대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음역대 안에서, 아주 편안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이번 무대에서는 적어도 자기가 아닌 누군가를 흉내 내지는 않겠다는 태도, 그게 장면 전체를 안정시켰다.
그 장면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리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일상이 나를 쉽게 건드렸다.
하루가 끝났는데도 마음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고, 감정은 이유 없이 바빠졌다. 괜찮다가도 갑자기 가라앉고, 사소한 말에도 괜히 마음이 쓰였다.
사소한 일이라도 마음이 오버타임에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그즈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딸의 권유가 계기이긴 했지만,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마음이 잠시라도 머무를 자리가 필요했다. 말로는 정리되지 않던 생각들을, 글로 천천히 풀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냥 '종이에 대고 투덜대기' 정도였는데, 다행히 종이가 내 편이 되어줬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조금씩 솔직해졌다.
괜찮은 척 넘겨왔던 마음이 아니라, 사실은 무엇이 힘들었는지, 무엇이 부담이었는지를 문장들이 대신 말해줬다. 막연하게 지쳤다고만 느끼던 감정에도 결이 생겼다. 불안이었고, 서운함이었고, 애써 외면해 온 피로였다.
내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지,
그리고 그 마음이 얼마나 오래 조용히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지도 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꽤 높은 음역으로 살아오고 있었다.
잘 해내야 한다는 톤으로, 괜찮은 척하는 속도로.
그 후로 가끔은 도저히 안 되는 날이면, 고음은 포기하고 중저음으로 슬쩍 넘어가기도 했다.
그럴 때는 '오늘은 음역대 휴일'이라고 스스로에게 공지한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굳이 힘을 줄 필요가 없었다.
누가 듣기 좋은 목소리도, 그럴듯한 결론도 필요 없었다. 지금의 나에게 맞는 리듬으로, 숨 쉬듯 적어 내려가면 됐다.
그래서 패자부활전의 무대가 오래 남는다.
그건 다시 잘해보겠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아, 이제는 이 정도 목소리로도 괜찮겠구나" 하고 스스로를 확인하는 시간처럼 느껴져서다.
인생도 꼭 본선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때로는 잠시 내려와 숨을 고르고, 내가 어떤 리듬으로 살아왔는지 가늠해 보는 구간이 있다. 더 잘 보이기보다는, 덜 무리하는 쪽을 선택하는 시간.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 낮춘 목소리로,
하지만 전보다 편안한 리듬으로
자기만의 무대에 서 있는 우리를 조용히 응원해 본다.
다시 잘하기보다, 내 목소리를 믿는 순간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