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아직 따뜻하다

세상은 아직, 사람 덕분에

by Susie 방글이

병원 복도는 언제나 비슷한 풍경이다. 하얀 벽, 은은한 소독약 냄새,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계음, 차분한 발걸음. 그리고 늘 이어지는 기다림.


신장 질환은 사람의 시간을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흐르게 만든다. 몸이 먼저 지치고, 마음도 어느새 무거워진다. 그 속에서도 사람은 또 웃고, 기대하고, 어쩌면 기적을 바란다.


30년 지기 친구의 남편은 몇 해 전 낯선 이에게 신장을 선물 받았다. 이름도, 얼굴도,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사람. 그저 “하나님이 마음을 주셨다”며 기꺼이 손을 내민 누군가가 있었다.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세상에 아직 이런 사람이 있다니, 믿기지가 않아.” 그 말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아직 세상은, 따뜻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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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도 그런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20년 전, 미국. 당뇨병으로 신장을 잃은 아빠가 1년 넘게 투석실을 오가던 어느 날, 병원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기증자가 생겼습니다. 지금 바로 오세요.” 기증자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스물셋 청년이었다. 그 가족은 깊은 슬픔 속에서도 누군가를 살리기로 했다.


그 선물이 우리 가족의 20년을 지켜줬다. 그 20년 속엔 소박한 밥상과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잔, 그리고 손녀, 손자들의 커가는 모습들이 담겨있다.


근데 인생도 참 야속하지, 이제는 엄마가 투석을 시작하셨다.


연세가 드니 몸도 마음도 더 지치신다. 가끔 “차라리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가만히 들을 때면 가슴 어딘가가 쿵하고 내려앉는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병원을 다니시고, 계절이 바뀌는 소리를 듣고, 또 투석이 덜 힘드셨던 날엔 기분이 좋아 웃기도 하신다.


가끔은 생각한다. 혹시 엄마에게도 기적 같은 인연이 찾아올까. 아빠처럼, 또 친구의 남편처럼, 어느 날 문득 누군가의 손길이 닿을 수 있을까. 세상 어딘가엔 아직도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을까.


수도 없이 드나든 병원 방


며칠 전, 우리는 이 친구와 부부동반으로 저녁을 함께했다. 오랜만에 옛날이야기를 꺼내며 타코벨 드라이브스루, 차 안 가득 퍼지던 타코 냄새 속에서 허겁지겁 먹던 시절을, 웃으며 함께 떠올렸다. 친구의 남편은 여전히 유쾌하게 “빨리 은퇴하고 같이 놀자”며 농담을 던졌다. 그 유쾌함 덕분에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그 순간, 우리가 이렇게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가만히 마음으로 되새겼다. 친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어려운 순간에도, 좋은 날에도.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이 살면서 몇이나 될까.


아빠는 선물 같은 20년을 살고 계시고, 엄마는 오늘도 병원에 다녀오셨다. 친구의 남편은 이제 누군가의 선의로 다시 삶을 걸어가고 있다.


이런 경험들 덕분에, 세상은 아직 따스함을 품고 있다는 걸 느낀다. 낯선 이의 선행, 친구의 웃음, 그리고 가족의 사랑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


어쩌면 당신의 작은 마음이 어느 누군가에겐 기적 같은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그 마음 하나가, 또 다른 웃음을 피워낼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렇게 아직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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