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삭한 경험, 입안의 여행
딸 집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함께 장을 봤다.
매일 이것저것 해 먹으니 냉장고를 자주 채워야 했고, 늘 그렇듯이 그날도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장바구니에 담았다. 우유, 달걀, 채소, 사과, 그리고 블루베리. 늘 사던 과일이었다.
블루베리는 원래 그런 존재다.
흐물 하고, 조금 물러서, 씹는다는 표현보다는 터진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과일.
나는 그렇게 알고 살아왔다.
집에 돌아와 씻지도 않은 블루베리를 하나 집어 들었다. 한 알을 씹는 순간, 이건 내가 알던 블루베리가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았다. 딱딱한 복숭아, 일명 ‘딱복’을 먹는 줄 알았다. 블루베리를 먹으며 이런 아삭한 소리가 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삭. 그리고 달았다. 향도 진했다. 질감이 먼저, 맛이 그다음, 향은 마지막으로 남았다.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입 안에서 형태를 유지했다. 내가 알고 있던 블루베리는 아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 블루베리는 멕시코산이었다. 스위트크리스프(Sweetcrisp)라는 남부 하이부시(Southern Highbush) 계열 품종으로, 과육이 매우 단단하고 아삭하며(Crisp), 당도가 높고 풍미가 우수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익숙한 블루베리와는 출발점부터 달랐다. 국산이나 완숙에 가까운 블루베리는 당도와 향은 나쁘지 않지만, 과육이 부드럽고 쉽게 물러져 씹히기보다는 입 안에서 퍽퍽하게 뭉개지는 쪽에 가깝다.
반대로 수출용 멕시코산 블루베리는 조금 덜 익은 상태에서 수확되어 저온 유통을 거친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단단함이 먼저 남고, ’ 이상할 만큼' 아삭하다. 당도 역시 최고다.
그러니까 그날의 블루베리는 우연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블루베리였다. 다만 나는, 그 차이를 너무 늦게 알아버렸을 뿐이다.
늦게 알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딸네 집에 있는 동안 매일 한 팩씩 먹었다. 착한 가격 덕분에 부담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블루베리는 더 이상 단순한 과일이 아니게 되었다. 맛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가 되었다. 한 번 단단한 감각을 알고 나니, 흐물한 블루베리는 예전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나빠서가 아니라, 이미 다른 질감을 경험해 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인생에서 한 번 본 풍경이 너무 강렬해, 그 이후의 모든 풍경이 그 기준점 위에서 평가되는 것처럼. 마음속에 생긴 눈금이 조금씩 내 선택을 재단한다.
이런 경험은 블루베리뿐만이 아니다. 가끔 쇼핑을 하다 보면, 딱 하나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만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있을 때 한 번 이쁜 물컵을 본 적이 있다. 너무 예뻐서 갖고 싶었지만, 비싸기도 하고 미국으로 가져올 번거로움 때문에 결국 안 샀다. 그 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른 것들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미국에서 다니던 중, 비슷한 컵을 1/3 가격에 파는 곳을 발견하고 결국 사 왔다.
우리는 가격을 보고 잠시 망설이게 되지만, 마음속 기준이 이미 그 자리에서 눈금처럼 굳어 있다. 그 후로 보는 모든 것이 그 기준으로 비교된다. 좋긴 한데 뭔가 덜하고, 충분한데 결정적이지 않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가게를 나온다.
지금 우리 동네에는 멕시코산 블루베리가 없다. 마트에서는 페루와 칠레산 블루베리만 만날 수 있다. 미국은 땅이 워낙 넓어서, 지역마다 들어오는 블루베리 산지가 다르다.
나는 매번 그 앞에 오래 서 있다. 손에 쥐고, 살까 말까 망설인다. 하지만 결국 집어 들지 않는다. 딱복 같은 아삭함, 달콤함, 향까지 한 번 알아버린 이후로는,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담을 수가 없다.
이제는 흐물한 블루베리는 아예, 식감이 부드럽게 즐길 수 있는 블루베리 파이나 페이스트리로 먹어야 할 듯하다. 한 번 아삭함을 맛본 기준은, 이렇게 작은 과일 하나로 내 선택과 만족뿐 아니라 삶 전체의 방향까지 바꿔 놓는다.
마음속에 남은 아삭함을 대신 즐기며, 나는 오늘도 마트 앞에서 잠시 여행자가 된다. 작은 기준 하나가 내 하루와 마음의 여정을 조심스레 안내한다.
딸에게 전화를 걸며, 아삭함을 대신 나눈다.
"블루베리, 많이 사 먹어~ "
사소한 한 입이, 이렇게 인생을 고르는 방식까지 바꿔 놓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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