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달라지는 것들

주연은 아니지만, 결을 살리는 조연

by Susie 방글이




까르보나라를 만들기로 한 저녁이었다. 헤비크림과 치즈, 베이컨, 양파는 이미 준비돼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요리는 충분히 성립했다. 까르보나라는 필수가 분명한 음식이다.


주재료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더하지 않아도 완성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화이트와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잠시 망설였다. 굳이 넣어야 할까. 없어도 맛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미 요리에 한참인 남편을 뒤로하고, 나는 와인을 사러 집을 나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길어야 10분 거리였다. 안 갈 수는 없지만, 가기 싫은 마음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수고라 부르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엔 몸이 먼저 반응하는 귀찮음이었다.


그런 애매한 선택 앞에서, 나는 늘 잠깐 멈춘다. 꼭 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 해도 되는 일이라 치부하기엔 마음이 계속 걸리는 순간들이다.


예를 들어, 테이크아웃하려고 들어간 카페가 너무 예뻐서 잠시 고민하는 순간이다. '그냥 가져갈까, 아니면 여기서 조금 마실까?' 작은 망설임이지만, 마음 한켠을 잡았다 놓았다 하며 하루의 속도를 잠시 느리게 만든다.


팬에 와인을 붓자, 가장 먼저 알코올 향이 치고 올라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 이후에 남은 건 베이컨의 기름진 향과 크림의 무게, 그리고 양파의 단내였다.


와인은 그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경계를 정리하듯 자리를 잡았다. 맛을 주도하지도, 앞에 나서지도 않았다. 크림과 치즈, 베이컨은 여전히 중심에 있었고, 와인은 그들을 빛나게 하기 위해 뒤에 머무는 역할에 가까웠다.


완성된 까르보나라는 생각보다 담백했다. 더 진해졌을 거라 짐작했지만, 실제로는 반대였다. 맛은 선명해졌고, 입 안에 남는 기름기는 줄었다. 한 포크를 넘길 때마다 재료들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와인은 분명 존재했지만, 존재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필수는 아니지만, 있으면 저녁의 결이 달라진다


주연은 아직 오지 않았고, 조연들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완성된 것은, 그 전의 수고를 알까.


생각해 보면, 삶에는 그런 요소들이 꽤 많다. 없어도 하루는 흘러가고,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하지만 있으면 장면의 결이 달라지는 것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아침 공기, 길가에서 스치듯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림자처럼. 삶의 중심은 아니지만, 하루의 리듬을 살짝 바꿔 놓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조연들이 모여 하루의 온도와 질감을 조금씩 달라지게 만든다.


화이트와인은 까르보나라의 필수는 아니다. 없어도 요리는 완성되고, 한 끼는 문제없이 지나간다. 하지만 그날의 접시 위에서는 분명 맛의 결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크림과 치즈, 베이컨이 중심을 지키는 동안, 와인은 뒤에서 전체를 정리하고 빛나게 만드는 조연이었다. 존재를 주장하지 않지만, 빠지면 허전하고, 있어야 비로소 풍미가 살아난다.


오늘은 와인이 주연. 조연이 있기에, 와인의 맛과 풍미가 더 또렷해진다.


인생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할 일들만으로도 하루는 돌아가지만, 굳이 덧붙인 선택 하나, 조금 일찍 움직인 마음 하나가 장면을 달라지게 만든다. 우리는 아마 그런 조연들 덕분에, 생각보다 더 풍미 있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가, 카페 안에 미리 앉아 책을 펼쳤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고, 누군가를 의식한 일도 아니었다.


휴대폰을 꺼내 들지 않고, 가방 속 책 몇 장을 넘기는 동안 서두르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짧은 시간 덕분에, 그날의 약속은 시작부터 조금 덜 급했고, 하루의 흐름도 부드러워졌다.


거창하지 않아도, 삶의 작은 조연이 되어 하루를 살짝 풍성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약속보다 먼저 앉아, 하루를 한 박자 느리게 정리한다.


모든 주연 뒤에는, 조용히 빛나는 조연들이 있다. 삶도, 요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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