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도 숙취가 남는다
와인과 각종 주류를 파는 매장, 와인 앤 스피리츠(Wine & Spirits)에 들어서면 나는 괜히 발걸음을 늦춘다. 서두를 이유도 없으니, 매장 안 가득 쌓인 병들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오늘은 어떤 병을 집어야 할지 잠깐 고민하게 된다.
그냥 한 병 고르면 될 일인데, 쉽지가 않다. 병들이 나에게 "오늘은 어떤 하루로 만들고 싶어?" 하고 조용히 묻는 느낌이다.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스파클링.
끝없이 이어진 선반 앞에서 나는 오늘의 기분을 슬쩍 떠올린다. 굳이 말로 정리하지 않아도, 손이 먼저 반응하는 날이 있다. 생각보다 손이 정직해서, 괜히 머리로 계산하면 틀릴 때가 많다.
레드와인은 밤에 쓰는 글 같다. 묵직하고 향이 진해, 한 잔 들면 말수가 줄고 지난 기억들이 문득 돌아온다. 하루의 소음을 모두 뒤로 하고, 나만의 시간을 마주한다. 마음 구석에 놓인 이야기들이 살짝 흔들리며 숨을 쉰다.
불을 조금 낮추고, 음악도 한 박자 느린 걸 고른다. 밤처럼 조용하지만, 쓰고 나면 마음 한쪽이 묵직하게 채워진다. 레드와인 글은 직감이 중요하다. 너무 오래 고민하면 향도 맛도 모두 흐려진다. 결론보다 술이 먼저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
화이트와인은 낮에 쓰는 글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밝고 투명하며 맛도 가볍다. 햇살 아래 짧게 끄적이는 글, 설명을 길게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즐겁다. 커피 한 잔 옆에 노트를 펼치고, 굳이 멋 내지 않아도 문장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문장이 조금 어긋나도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웃으며 넘길 수 있다. 글도 이렇게 편하게 쓰면, 숨통이 트이고 다음 글을 쓸 수 있다.
스파클링은 생각이 번쩍 들 때 등장한다. 톡 쏘고 시원하며, 짧아도 괜찮다. 오래 고민할수록 재미가 사라질 것 같은 글. 어, 이거 생각보다 재밌네? 하고 스스로 먼저 웃게 된다. 메모장에 급히 적어두지 않으면 금세 사라질 것 같아서, 서둘러 남기는 생각들. 잠시만 붙잡아도 마음이 환해진다.
소주는 bittersweet 한 글에 가깝다. 달지도, 쓰지도 않은데 마시고 나면 꼭 마음이 남는다. 잘 보이려고 고치지 않은 문장, 누가 좋아할지 계산하지 않은 말들. 단어 선택이 조금 어색해도, 비유가 덜 멋있어도 그냥 둔다.
별일 아닌 하루를 적었을 뿐인데, 이런 글이 이상하게 제일 솔직하다. 읽히는 글보다 먼저 나에게 닿는 글. 오늘은 아, 이게 바로 내 마음속 한 줄이었구나 하고 혼잣말하게 된다. 가끔은 글보다 소주가 더 진실을 빨리 꺼내놓는 날도 있다.
막걸리는 자연스럽게 추억을 부른다. 탁하지만 정감 있고, 파전처럼 같이 있어야 제 맛이 나는 글. 요즘 이야기를 쓰다 말고, 자꾸 옛날 장면이 끼어든다. 여행을 떠났던 날, 길을 헤매며 웃던 순간이 떠오르며 잠시 미소가 번진다. 문장은 조금 엉성해도, 마음만은 이상하게 따뜻해진다. 단, 막걸리와 추억은 적당히 섞어야 한다—넘치면 글이 아니라 회상이 된다.
위스키는 글의 온도를 단숨에 올린다. 향도 진하고 알코올 도수도 높다. 한 줄이면 충분히 임팩트를 주는 글, 읽는 사람을 잠깐 멈추게 한다. 괜히 밑줄을 긋게 되고, 다시 한번 읽게 만든다. 잠깐, 이 한 줄 때문에 계속 생각나네, 하고 머릿속에서 맴도는 문장. 다만 욕심내서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글보다 머리가 먼저 아플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어떤 술과 닮은 글을 선택할까 잠시 고민한다. 격식보다는 컨디션이 중요하다. 잘못 마시면 숙취가 남듯, 안 맞는 글도 하루를 무겁게 만든다.
밤에 레드로 길게, 낮엔 화이트로 가볍게, 스파클링으로 번쩍, 소주로 bittersweet 하게, 막걸리로 추억하며, 위스키로 강렬하게. 오늘 내 마음에 맞는 글 한 잔이면 충분하다.
가끔은 늘 먹던 음식 말고, 늘 마시던 술 말고 다른 걸 시켜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야 덜 질리고, 더 오래 즐길 수 있다. 늘 같은 것만 고르면, 아무리 좋아도 금세 질린다.
글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무겁기만 해도, 가볍기만 해도 오래 쓰기는 어렵다. 기분 따라, 날씨 따라, 컨디션 따라 조금씩 바꿔가야 다시 펜을 들게 된다. 아마 그렇게 해야 글도 나도 오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잘 쓴 글보다는, 내일도 다시 쓰고 싶어지는 글을 고른다.
오늘의 글이 내일도 나를 불러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P.S
이 생각은 며칠 전부터 품고 있었고, 글도 이미 쓰기 시작한 상태였다. 마무리만 남겨둔 채 미루고 있었는데, https://brunch.co.kr/@flyingpie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나서야 병을 열 용기가 났다. 글도 술도, 가끔은 누군가 먼저 열어줘야 손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