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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옆 랜치 드레싱

락앤락과 피자박스 사이

by Susie 방글이

대학교 기숙사 좁디좁은 방 한구석, 바둑판 두 칸만 한 미니 냉장고가 있었다.
그 안에는 엄마가 싸준 깍두기 한 통, 고추장, 그리고 콜라 두 캔.
돈이 궁했던 그 시절, 내겐 그게 전 재산이자, 홈시크(Home Sick)를 막아줄 비상식량이었다.


어느 날, 미국인 친구가 놀러 와 음료수를 꺼내주겠다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깍두기 냄새가 쫙 퍼졌다.
아실 거다. 그 냄새. 깍두기인지 방귀인지 구분이 안 가는 바로 그 향기.


나는 친구의 굳어가는 표정을 봤다.
그 친구는 아무 말 없이 콜라를 따더니 벌컥벌컥 마셨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 우정 여기까지인가…'


그런데 뜻밖에도, 그 친구는 결국 깍두기 덕후로 진화했다.
지금은 그 집 냉장고에도 김치통이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아직도 우린 그때 이야기를 꺼내며 한바탕 웃는다.
냄새로 시작된 우정, 이 정도면 꽤 성공적인 냄새 마케팅이 아닐까. 그리고 든 생각.

나야말로 그때 이미 K-푸드를 미국에 마케팅한 1세대가 아니었나 싶다. 그 친구 깍두기 홀릭 된 걸 보면, 내 덕분에

한국 문화 체험 제대로 한 셈이다.


생각해 보면, 냉장고란 것이 그냥 음식을 보관하는 차가운 박스가 아니다.
그 집 사람의 입맛과 생활방식, 성격까지 담긴 작은 세계다.

그 친구는 당시 기숙사가 아닌 아파트에서 두 명의 룸메이트와 살았다.
한 번은 그 집 냉장고를 열고 또 한 번 놀랐다.
거의 사람 키만 한 냉장고에 머스터드, 케첩, 랜치드레싱, 봉지 샐러드, 피자 박스가 그득했고
냉동실엔 치킨 윙과 각종 육류, 아이스크림 통이 쌓여 있었다. 마치 ‘미국형 냉동 창고’ 같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여긴 냉장고만 열어도 마트 안 가도 되겠다.'


우리 집 냉장고가 떠올랐다.
한국 가정집 냉장고는 정말 정교하고 치밀하게 식재료를 컨트롤한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MVP가 있으니, 바로 '락앤락'이다.

솔직히 한국 집 냉장고에 락앤락 없는 집은 없을 것이다. (그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국민 필수템, 대한민국 냉장고의 표준 장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깻잎은 소 사이즈, 장조림은 중 사이즈, 김치는 대형 락앤락.
각종 반찬에 따라 사이즈별로 깔맞춤까지 한다.



나는 진심으로 락앤락 개발자에게 국민훈장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집에 가면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투명 플라스틱 통들이 마치 자기의 지위를 뽐내 듯 빽빽하게 차 있다.
깻잎, 오징어젓, 멸치볶음, 무생채, 장조림… 뭐든 락앤락에 담긴다.


한국은 '반찬을 먹는 나라'다.
많은 반찬을 정리하려면 락앤락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없었으면 냉장고 난장판 주의보 발령이다.


자연스레 어머니 냉장고가 떠올랐다.
당신의 냉장고 문을 열면 작은 락앤락 통들이 마치 군인처럼 정렬되어 있었다.
하나씩 열어보면 데친 브로콜리 몇 송이, 멸치볶음 서너 마리, 묵은지 조각 하나.
그걸 보며 괜히 웃음이 났다.

‘이걸 왜 이렇게 따로따로 소중하게 담아두셨을까.’

생각해 보면,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의 어려운 시절을 겪어오신 어머니의 정성이었다.
버릴 것도, 남은 것도 다 챙겨서 다시 밥상에 올리는 삶의 방식.
그 냉장고 앞에 서서 락앤락 뚜껑을 열며
"아이고, 이건 또 뭐지?"
웃던 기억이 지금도 정겹다.


그리고 그 냉장고 냄새.
온갖 반찬들이 섞인 복합 향기.
아직도 코끝에 맴돈다.


결국 나도 어머니 냉장고를 닮아가는 중이다.
미국 냉장고는 문을 열면 우유, 치즈, 머스터드 냄새 정도.
한국 냉장고는 락앤락 뚜껑 열 때마다 작은 향수 쇼가 펼쳐진다.
모든 반찬 냄새가 오케스트라처럼 한 번에 몰려오는데,
그마저도 정겹다.


그리고 한국사람이라면 다 아는 비밀이 있다.

락앤락의 플라스틱 뚜껑은 절대 냄새를 100% 못 없앤다.

김치 담았던 락앤락에 과일이나 샐러드 담으면, 딸기에서 은은한(?) 마늘 향이 나고, 샐러드에서 김치 맛이 어른거린다. 처음엔 '맛이 왜 이래'하며 놀라는데, 나중엔 먹다 보면 익숙해진다.

이쯤 되면 두 나라 문화가 냉장고 안에서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이다. 과일도 김치향 한 스푼 묻힌 한류 스타 같은 느낌이랄까.


요즘은 두 문화가 섞여 미국 마트에도 고추장이 진열되고,
한국 냉장고에도 피클병과 랜치 드레싱이 슬쩍 자리 잡았다.
하지만 냉장고 문을 열어보면 그 집 사람의 정체성은 숨길 수 없다.


미국 애리조나 사막 지역을 다니다 들린 마트에서 널 만날 줄을.....


나 역시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고추장 옆에 랜치드레싱 병이 나란히 있는 걸 보면 괜히 웃음이 난다.
이 작은 냉장고 안에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아온 내 인생 이력서와 입맛 히스토리가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언젠가 누군가 우리 집 냉장고를 열어보고
"이 집은 어떤 사람인지 딱 알겠네."
라고 말하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냄새 좀 나도 괜찮죠? 여긴 스토리가 있는 집이에요."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감이 왜 여기서 말라?

여긴 미국, 감은 한국

시래기는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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